형사공동연구회

  • 정치·법제
  • 단체
1923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단체.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최종고 (서울대학교, 법학)
  • 최종수정 2026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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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3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단체.

내용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권익옹호를 위하여 한국인 변호사들이 조직하고 활동한 단체이다. 1923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75번지에서 김병로(金炳魯) · 허헌(許憲) · 이인(李仁) · 김태영(金泰榮) · 이승우(李升雨) · 김용무(金用茂) 등 당시 명망 있는 변호사들이 조직하였는데, 정확한 이름은 형사변호공동연구회이다.

그 취지는 ‘한 사람에 대한 보수로 5명이 공동연구하여 변호한다.’는 것으로, 한일법조인들의 공동전선이었다. 명칭은 형사변호공동연구회였지만 실제로는 법정투쟁을 통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무죄로 주장하고,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투사들에게 사식(私食)을 넣어 주고 유족을 돌보아 주는 등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의 후원단체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법조인들의 법정을 통한 애국활동은 『동아일보』 · 『조선일보』 등 민족지의 활발한 보도를 통하여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많은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 연구회에서 맡은 사건으로는 상해임시정부요인에 관한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 · 여운형(呂運亨)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해외독립운동자에 관한 사건으로 정의부(正義府) 연통제(聯通制), 광복단(光復團) 김상옥(金相玉) 등의 사건, 3·1운동에 잇따른 각지의 독립만세사건, 6·10만세사건광주학생사건 · 원산노조파업사건 · 조선공산당사건 · 간도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이러한 법정투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김병로의 말을 빌리면 “변호사라는 직무가 그다지 큰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의 현실에서, 첫째 가장 우리에게 발악하던 경찰도 변호사라면 함부로 폭행이나 구금을 하기 어려웠다는 것, 둘째 그 수입으로 사회운동자금에 충당할 수 있다는 것, 셋째 공개법정을 통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 등이 약자인 우리에게 무기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일제당국은 항일운동이 치열해지자 비위에 거슬리는 변호사들에게 이른바 사상범에 대한 변호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총독부는 그들이 지정한 변호사 외에는 사상에 관련된 사건은 변호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이 연구회에 소속된 회원들은 그 지정을 받을 수 없게 되어 활동이 흐지부지되었다.

참고문헌

  • - 『판례로 본 삼·일운동사』(정광현, 법문사, 1978)

  • - 『가인 김병로』(김진배, 가인기념사업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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