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좌의병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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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근대사
단체
1896년(고종 33) 1월 강원도 영월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진.
단체
설립 시기
1896년 1월
설립자
유인석|이춘영|안승우|신지수|김백선 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은 1896년(고종 33) 1월 강원도 영월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진이다.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 이춘영, 전군장 안승우, 후군장 신지수, 선봉장 김백선 등을 임명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10월까지 제천을 거점으로 원주, 영월, 영춘, 단양, 풍기, 충주, 음성 등지에서 항쟁을 지속하였다.

정의
1896년(고종 33) 1월 강원도 영월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진.
변천 및 현황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각종 제도가 개혁되자, 1895년(고종 32) 5월 유인석(柳麟錫)은 장담(長潭: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500∼600명의 유생들에게 국난에 대처할 것을 강론하였다. 이어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이 발생하고, 끝내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그중 경기도 지평에서 이춘영(李春永 · 안승우(安承禹) 등이 제천으로 들어가자, 유중교(柳重敎)와 유인석의 문하인 이필희(李弼熙) · 주용규(朱庸奎) · 서상렬(徐相烈) 등이 제천의진(堤川義陣)에 들어갔다. 이들은 단양 일대에서 접전한 뒤 풍기, 영춘을 지나 영월에 들어갔다. 이것은 유인석이 중국에 갈 예정으로 행장을 수습하던 중 제천의진의 소식을 접하고 영월에서 회의할 것을 제의, 소집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中軍將) 이춘영, 전군장(前軍將) 안승우, 후군장(後軍將) 신지수(申芝秀), 선봉장(先鋒將) 김백선(金伯先), 좌군장(左軍將) 원규상(元奎常), 우군장(右軍將) 안성해(安成海), 참모(參謀) 박주순(朴胄淳), 사객(司客) 장충식(張忠植), 종사(從事) 이조승(李肇承) · 홍선표(洪善杓) · 이기진(李起振) · 정화용(鄭華鎔) 등으로 부서를 결정하였다.

주요 활동

2월 영월을 떠나 제천에 머물면서 단양군수 권축(權潚),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붙잡아 참형한 뒤, 호서의 중심지인 충주성을 공격 · 함락하여 15일간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그 동안 호좌의병대장 유인석의 이름으로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란 격문을 발송하고, 적의 근거지인 수안보(水安堡)를 점령하기 위해 몇 차례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때 평민 출신 김백선을 군기 문란의 죄목으로 처형하는 등 유생 중심의 한계성이 드러났고, 주용규 · 이춘영이 전사하는 등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3월 초 충주성을 탈출, 청풍을 거쳐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5월 하순 제천성이 함락당할 때까지 제천을 거점으로 원주, 영월, 영춘, 단양, 풍기, 충주, 음성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리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안승우가 전사하자, 제천성을 탈출하여 단양에서 군진을 수습하였다.

6월 이후 관군 · 일본군과 항쟁하면서 서북행의 대행군을 감행하였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용감한 지사들을 규합하여 재기하려는 계획이었다. 8월 하순, 유인석은 평안도 초산(楚山)의 아성(阿城)에서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남기고 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국내에 잔류한 의진은 각기 독자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9∼10월까지 항쟁을 지속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종의록(從義錄)』
『창의견문록(倡義見聞錄)』

단행본

『의암 유인석 백절불굴의 항일투쟁』(의암학회, 20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1-의병항쟁사』(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논문

구완희, 「을미의병기의 호좌의진(湖左義陣)과 충주」(『蘂城文化』 35, 예성문화연구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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