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주택영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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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주택난 해소를 위해 1941년 창립된 특수법인.
내용 요약

조선주택영단은 일제강점기에 주택난 해소를 위해 1941년 창립된 특수법인이다. 조선총독부가 도시의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조선주택영단은 19개 도시에 주택 2만호 건설의 4개년 계획을 세웠다. 해방 전까지 건설한 주택은 총 1만 2,184호 정도였다. 조선주택영단은 해방 후에도 당시의 급박한 주택난 때문에 미군정 감독 하에 존속하였다. 주로 적산가옥 철거민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주택영단은 우리나라 공공주택 공급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정의
일제강점기에 주택난 해소를 위해 1941년 창립된 특수법인.
개설

조선총독부가 도시의 주택공급에 본격적인 대책을 강구하게 된 것은 1941년부터이며, 그 과정에서 심각한 주택난을 타개하고 주거에 관한 국민생활의 향상 · 발전을 기할 목적으로 설립된 조직이 조선주택영단이다.

설립위원회에서 1941년 6월 21일에 만든 정관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영단은 서민주택건설 공급을 목적으로 한다. ② 정부출자금 8백만원을 4개년 분할 출자한다. ③ 자금의 10배 한도 내로 주택채권을 발행할 수 있다. ④ 임원은 이사장 1인, 이사 2인, 감사 1인으로 하되 이사장, 이사 임기는 3년, 감사는 2년으로 한다. ⑤ 평의원을 두어 자문을 받는다. ⑥ 실무수행에는 영업세, 등록세, 인지세, 부동산소득세의 면제를 받는다. ⑦ 필요할 때는 토지를 수용할 권가 있다 등이다.

설립 당시 주택영단의 사옥은 경성부 광화문동 84번지(현 광화문전신전화국)에 있던 총독부 전매국 4층으로 정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종로2가 YMCA 건물 내에 영단 건설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연원 및 변천

총독부가 뒤늦게 조선주택영단을 창설한 것은 당시 일본주택영단 창설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반세기쯤 앞서 근대화를 이룩하였지만 주택정책만은 무관심하였다.

일본의 주택공급은 주로 대가업자(貸家業者)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1941년 당시 오사카[大阪]에서는 총 주택의 90%, 도쿄에서는 70%가 민간업자들에 의한 셋집[貸家, "ゥ"オ"秕]이었다.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후의 주택재건을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동윤회(同潤會)라는 것이 있었는데, 1941년에 주택영단에 흡수될 때까지 18년간에 겨우 1만호의 서민주택밖에 공급하지 못하였다.

이상과 같은 주택정책 부재 속에 일본의 주택부족은 날로 심해졌고 폭등하는 집값이 다른 물가상승을 선도하자 일본 정부는 1941년 5월에 1억원을 출자하고 5년간에 3만호의 주택을 공급할 계획으로 일본주택영단을 창설하였다.

국내에서도 조선주택영단의 설립준비는 1941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해는 주2이 4년째 접어드는 해였고, 12월 8일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전시긴장이 가득 차있었다.

모든 물가는 전면 동결되고 노동력은 강제 동원되었으며 일부에서는 방공(防空)을 위한 주택소개론(住宅疎開論)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영단설립 준비는 강행되었다. 이리하여 같은 해 6월 14일 총독부령 제23호로 조선주택영단령이 제정 · 공포되고, 같은 해 7월 1일자로 특수법인 조선주택영단이 창설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은 설립과 동시에 주택건설 4개년 계획을 세웠다. 총독부는 1941년 1월 현재 경성을 포함한 19개 도시에 절대 부족한 주택이 6만호이며, 그 3분의 1인 2만호를 4년 동안에 건설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총독부의 의욕과 달리 패전말기의 상황으로 자재난 속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영단은 설립 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전까지 영단이 건설한 주택은 총 1만 2,184호에 불과하였다.

조선주택영단은 해방 후에도 그 당시의 급박한 주택난 때문에 존재의 가치와 의의를 인정받아, 일제시대의 다른 조직들이 해체된 것과 달리 미군정의 감독 하에 존속하였다. 그러나 신규 주택 건설은 거의 부진하였으며, 적산가옥 철거민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주택영단은 우리나라 공공주택 공급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주택영단으로 개칭되었고, 1962년 공포된 대한주택공사법(법률 3841호)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로 발족하였으며, 2009년에는 한국토지공사와 통합되어 한국토지주택공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 600년사-일제강점기-』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96)
『대한주택공사 30년사』(대한주택공사, 1992)
「조선주택영단등기취급규칙」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관보』, 1941.6.14)
「주택정책의 재음미: 주택영단 탄생에 제하여」 (조선춘추사, 『춘추』2-7, 1941)
주석
주1

‘간토 대지진’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 우리말샘

주2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서 비롯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는데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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