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운동 당시 신태윤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梧谷面) 오지리(梧枝里)에 거주하며, 곡성보통학교 부훈도(副訓導)를 맡고 있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1919년 3월 중순, 신태윤은 정래성(丁來聖), 김중호(金仲浩), 양성만(梁成滿), 박수창(朴秀昌), 김기섭(金基燮), 김태수(金泰洙) 등 청년들을 규합하여 3월 29일 곡성읍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작성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3월 29일 장터에 군중들이 모이자, 신태윤은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다가 일제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태윤은 1925년 대종교의 교리를 다룬 『삼일신고강의(三一神詁講義)』를 발간하였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받았지만 거부하고 칩거하였다. 광복 후 곡성군 건국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조선대학교가 설립되자 사학과 교수로 재임하였다.
저술로 『정사(正史)』, 『삼일신고강의』가 있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