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876년 7월 18일 출생하여 1919년 4월 15일 사망하였다.
안경순(安慶淳)은 1919년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 군증은 일본인 소학교, 면사무소에 투석하고 불을 지르며 만세를 연호하였다.
일본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시위대 1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시위는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치안 상황이 점차 불안해지자 일제는 발안 거주 일본인들을 삼계리로 피신시키고 경계 태세를 강화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송산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서 수원경찰서 소속 순사부장 노구치 히로조[野口廣三]가 처단되고, 4월 3일 화수리 항쟁에서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연이어 참살되자 일제는 수원 전역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과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79연대 소속 보병 11명은 제암리 마을로 들어와 제암리 성인 남자들을 교회에 가둔 후, 집중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이어 고주리로 가서 독립운동가 김흥렬(金興烈)을 비롯한 김성열(金聖烈), 김세열(金世烈), 김흥복(金興福), 김주남(金周男), 김주업(金周業) 등 6명을 참살하였다.
일제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교회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시신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날의 사건으로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 총 29명이 사망하였다. 안경순은 그의 아들 안상용(安相鎔)과 함께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