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광무 9) 11월 을사조약 후, 전직 관료인 나인영(羅寅永)과 오기호(吳基鎬)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정부와 요인들을 상대로 일본의 대한 정책을 탐색하고, 한국 독립 청원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청이 무산되자, 나라를 일본에게 팔아먹는 데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을 처단하여 국권을 회복하기로 행동 방침을 바꾸었다. 1907년 2월 이들은 자신회(自新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친일 대신들을 처단하려 하였다.
1907년 3월 25일 나인영과 오기호가 조직한 4인 1조의 6개조 결사대는 친일 대신 격살(擊殺)에 나섰다. 이들은 광화문, 돈의문, 합동(蛤洞) 등지에서 박제순(朴齊純), 이완용(李完用), 이하영(李夏榮) 등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호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사동(寺洞)에서 이홍래(李鴻來)의 결사대원 강원상(姜元相)이 권총으로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하였다. 권중현 피격 사실을 전해 듣은 이근택(李根澤)은 집에 은신하여 결사대의 공격을 피하였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재차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의병장 출신의 박대하(朴大夏)에게 장사들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거사의 전말을 토로하였다. 이로 인해 거사 동지들이 일본 군경에게 체포되었다. 4월 1일 나인영과 오기호는 거사 관련 문서를 갖고 평리원에 자수하였다.
거사일에 황경오(黃景五)는 최상오(崔相五), 박응칠(朴應七)과 함께 사전에 친일 대신들을 공격하기로 약속한 장소로 갔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고 피신하여 돌아왔다. 이후 동료 20여 명과 함께 각기 총과 몽둥이를 가지고 전라북도 금산군(錦山郡 : 현, 충청남도 금산군) 보광리(寶光里)와 두두리(斗頭里) 등지를 돌며 조총과 금전 등을 빼앗았다가 일본 군경에게 붙잡혔다.
1907년 7월 3일 평리원 재판에서 최상오, 박응칠과 함께 교살형(絞殺刑)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