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후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 대신들에 대한 비판 열기가 높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2월 일본에서 한국독립 청원 활동을 벌이고 돌아온 전직 관료 나인영(羅寅永)과 오기호(吳基鎬)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을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자신회(自新會)라는 비밀결사를 통해 장사들을 모집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07년 3월 25일 오기호, 김동필(金東弼), 이홍래(李鴻來), 이용채(李容采) 등이 거느린 4인 1조의 6개조 결사대는 광화문에서 박제순(朴齊純)을, 돈의문에서 이완용(李完用)을, 합동(蛤洞)에서 이하영(李夏榮)을 노렸으나 일본군의 호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사동(寺洞)에서 이홍래의 결사대원 강원상(姜元相)이 권총으로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였으나 명중하지 못했다. 이근택(李根澤)은 권중현 피격 사실을 전해 듣고 집에 틀어박혀 결사대의 공격을 피하였다.
나인영, 오기호는 재차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박대하(朴大夏)에게 장사들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종원(侍從院) 부경(副卿)을 지낸 서창보(徐彰輔)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거사 계획을 토로하였다. 이로 인해 거사의 전말이 일제에게 탄로되어 거사 동지들이 체포되었다.
거사일에 최상오(崔相五)는 박응칠(朴應七), 황경오(黃景五)와 함께 친일 대신들을 처단하기로 약속한 장소로 갔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고 피신하여 돌아갔다. 이어 동료 20여 명과 함께 각기 총과 몽둥이를 가지고 전라북도 금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보광리와 두두리 등지에서 항일 활동에 필요한 조총과 금전 등을 빼앗았다가 일제 군경에게 체포되었다.
1907년 7월 3일 평리원 재판에서 박응칠, 황경오와 함께 교살형(絞殺刑)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