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륭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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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헌
  • 조선 후기
1789년 정조가 장헌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이장하고 지은 어서. 지문.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임민혁
  • 최종수정 2023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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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현륭원지」는 1789년 정조가 장헌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이장하고 지은 지문이다. 정조가 장헌세자의 현릉원을 수원부 화산으로 이장하고 지석의 지문을 친히 지었다. 지석은 묘 옆이나 앞에 묻는 것인데 지석에 새긴 글이 지문이다. 지문에는 죽은 사람의 생몰년, 행장, 묘소의 위치 등이 적혀있다. 「현륭원지」에는 원의 위치·작성 경위·가계·행록·추숭·자손 등을 기록하였다. 현륭원 지문은 정조의 『홍재전서』 16권에 수록되어 있다. 글의 작성에 이용된 전거들은 「행록」, 「기주」, 『궁중기문』, 『정원일기』, 『궁원의』 등이다.

정의

1789년 정조가 장헌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이장하고 지은 어서. 지문.

개설

장헌세자의 무덤 현륭원(顯隆園)은 수원부 화산(花山)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위치해있다. 1789년(정조 13) 가을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영우원(永祐園)은 체제가 미비한 점이 많아 옮겨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마침내 무덤의 자리를 화산에다 정했다. 그해 10월 7일에 그곳으로 이장하고 원호를 ‘현륭(顯隆)’으로 바꾸었다. 그 이전 8월에 정조는 지문을 친히 지을 것이며,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쓸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픔을 누르고 참아가며 피눈물을 떨구면서 써나가겠다.’고 한 바 있다.

내용

이 지문은 정조가 지은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6권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가 1789년(정조 13)에 직접 지었다. 사도세자를 현륭원으로 이장할 때, 재궁을 현궁에 내린 것이 10월 7일이었는데, 이날의 실록 기사에서는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이 봉폐(封閉)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봉폐관 박성태가 ‘신이 삼가 봉합니다〔신근봉(臣謹封)〕.’라 쓰고 서압을 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가 9삽의 흙을 덮자, 총호사가 역군들을 거느리고 전면의 옆에 회를 다지고, 바로 퇴광에 회를 채워서 하현궁(下玄宮)에 맞추고 지석(誌石)을 묻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때에 묻은 지석에 새긴 글이 곧 현륭원 지문이다.

지문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년, 행장(行狀), 묘소의 위치와 좌향 등을 적은 글이다. 「현륭원지」에는 원의 위치와 좌향, 작성 경위, 이름과 가계,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행록(行錄), 사후의 관련 사건과 치제 및 추숭, 자손 등을 기록하였다.

주요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도세자는 휘(諱)가 선(愃)이고 자(字)가 윤관(允寬)이다. 숙종의 손자이며 영조의 아들로,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소생이다.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칭하고 보양관 상견례를 거행하였으며,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매우 영민하여 궁중(宮中)에서 언젠가 한 번은 팔괘(八卦) 모양의 가루 떡을 올렸는데, 이를 들지 않고 ‘팔괘를 형상한 떡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항상 무명옷을 입어서 타고난 품성이 검소하였다.

1742년(영조 18) 3월에 성균관 입학례를 거행하였다. 1년 만에 관례를 행하고 이듬해 정월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독서에 부지런하였으며, 서연(書筵)에서 행한 여러 강론들을 열거할 정도로 명석하였다. 화평옹주(和平翁主)와는 각별한 관계였는데, 저승전(儲承殿)에서 거처하는 세자를 둘러싼 양육의 문제가 발생하자, 삼종혈맥을 중시하라는 청을 영조가 들어주도록 한 바 있다.

1749년(영조 25)에는 대리청정의 명이 내려졌다. 이어서 위민과 효제의 가법을 강조하는 세자의 덕성과 돌림병이 극심할 때와 의소세손이 죽었을 때 및 정성왕후 국상 때의 효성, 치국과 인재의 선발에 대한 그의 견해와 고사에 대한 해박함, 출중한 무예실력으로 진법과 기예의 습득을 강조하는 지도력, 각종 치적 등이 차례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1762년(영조 38)에 복주된 나경언(羅景彦)의 투서에 의한 사건의 경과 과정과 세자의 죽음, 이 사건에 연루된 자들에 대한 조치와 세자의 죽음에 항의하는 윤숙(尹塾)임덕제(林德躋) 등의 사건, 1764년(영조 40) 가을의 입묘례(入廟禮) 이래의 치제와 영조의 임오의리에 대한 하교 등 한 서린 감정의 표현이 빠질 수 없었으며, 끝에는 장헌(莊獻)이라는 시를 올리고 궁원의 호칭을 개정하며 존호를 추가해 올린 사실과 2남 2녀의 자손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 글의 작성에 이용된 전거들은 「행록」, 「기주(記注)」, 『궁중기문(宮中記聞)』, 『정원일기』, 『궁원의』 등이다.

참고문헌

  • - 『정조실록(正祖實錄)』

  • - 『홍재전서(弘齋全書)』

  • - 『현륭원지문(顯隆園誌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lib.aks.ac.kr)

주석

  • 주1

    :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사도 세자의 묘. 정조 때 영우원을 고친 것으로, 후에 사도 세자를 장조로 추존(追尊)하고부터 ‘융릉’이 되었다. 우리말샘

  • 주2

    : 묏자리나 집터가 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바라보는 방향. 또는 그렇게 앉은 자리. 우리말샘

  • 주3

    : 조선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 정조 때 현륭원으로 고쳤다가 광무 3년(1899)에 융릉(隆陵)으로 승격하였다. 우리말샘

  • 주4

    : 국상(國喪)에 관한 모든 의식을 총괄적으로 맡아보던 임시 벼슬. 우리말샘

  • 주5

    : 임금의 시신을 묻는 광중에 관을 모시고 남은 앞쪽 빈 곳.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그릇이나 악기 따위를 넣은 돌함을 묻는 곳이다. 우리말샘

  • 주6

    :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 조상의 계보, 생일과 죽은 날, 평생의 행적, 가족 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되며 무덤 앞이나 옆에 묻혀 있다. 우리말샘

  • 주7

    : 조선 시대에, 보양청(輔養廳)에 속하여 세자(世子)와 세손(世孫)을 교육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세자 보양관은 정일품에서 종이품, 세손 보양관은 종이품에서 정삼품이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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