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태(鄭憲台)는 1902년 12월 22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유학자 정상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940년 6월 28일 사망하였다.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정헌태는 1919년 3 · 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간도전위대(間島前衛隊)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21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개성의 광진학교(廣進學校)에서 근무하다가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유학하며 조선유학생연합웅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고, 1927년 신간회 동경지회가 창립될 때 간사를 맡았다.
유학을 중단하고 국내로 돌아와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8년 신간회 경성지회 대표로 여자상업학교 동맹휴학을 조사하였고, 1929년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부 상무 간사를 맡아 전국을 순회하며 조직의 확대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8년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조사연구부원을 맡았으며, 1929년 조선공산당 후계 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준열 등과 함께 경성고학당(京城苦學堂)에 조직된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편하였다. 안상훈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을 위한 열성자대회(熱誠者大會)를 추진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어 193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 중에 대전역과 시가에서 최익한 등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이 추가되었고,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6년 만기 출옥하였으나, 1937년 다시 권오직 등과 함께 시국사건의 증인으로 경찰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서울의 전염병 환자 격리병원인 순화원(順化院)에서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유행하였던 천연두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7년 10월 진주정씨 대제학공파 종친회에서 충청남도 서산시의 후원으로 「진주정공헌태 독립투사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