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李敏雨)는 1915년 9월 5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인석(仁石)이다. '삼양동 거사'라는 별호가 있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입학하여 다음 해 중퇴하였다. 김동분(金東粉)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다.
8 · 15광복 후 청주시동연합회 부회장과 『충북신보』 총무국장 겸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던 이민우는 1952년 실시된 제1회 충북시의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충북시의회 부의장과 민주국민당 충북도당 사무국장을 지냈다. 1955년 통합 야당으로서 민주당이 창당되자 여기에 참여해 중앙위원, 충북도당 위원장, 충주시당 위원장직을 맡았다. 계파로는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다.
이민우가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 때이다. 이 선거에서 이민우는 청주에서 당선되었고, 1960년 4 · 19혁명 후 실시된 7 · 29 총선에서 재선되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총리 임명 문제로 극심한 신 · 구파 갈등을 겪었고, 결국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이민우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해 원내 부총무를 지냈으며, 유진산(柳珍山)을 중심으로 한 진산계(珍山係)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5 · 16군사쿠데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이민우는 해금되자 1965년 통합 야당으로 출범한 민중당에 참여해 조직국장과 당무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또한, 1967년 새롭게 창당된 통합 야당 신민당에서 정무위원, 당기위원장, 원내총무,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해 1967년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73년 제9대 총선에서는 청주시 · 청원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또한, 9대 국회의 후반기 부의장을 지냈다. 제10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었고, 신민당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민우는 진산계 출신의 상도동계 중진으로, 신민당이 김영삼의 강경파와 이철승의 온건파로 대립할 때 김영삼을 지원하였다. 이 인연으로 1980년 김영삼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게 되자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을 맡았다. 또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뒤에는 김영삼, 김동영(金東英) 등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결성해 활동하였다.
1984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금된 이민우는 1985년 1월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제12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 · 중구에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신한민주당 돌풍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이민우는 1986년 12월 24일 민주화 7개 항이 실현되면 전두환 정권이 주장하는 내각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해 야당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김영삼과 김대중계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신한민주당은 와해되었다.
이민우는 1987년 정계를 은퇴한 후 민족통일국민운동 중앙위원, 대한민국헌정회 원로자문회의 위원, 자유민주민족회의 고문,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2004년 12월 9일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