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李萬燮)은 1932년 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부 금정2정목(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3가)에서 이덕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합천(陜川), 호(號)는 청강(靑江)이다. 대구 수창국민학교와 6년제 대륜중학교를 거쳐 1957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이만섭은 동아일보사 정치부 기자와 주일특파원, 주미특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5 · 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박정희 의장에게 발탁되어 1963년 10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고, 그해 11월 실시된 제6대 총선에서 전국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5년에는 민주공화당 원내 부총무를 지냈으며, 1967년 제7대 총선에서는 대구 중구에서 출마해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제8대 총선에서 신민당 한병채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고, 제9대 총선 때는 민주공화당 후보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대구 중구 · 서구 · 북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민주공화당이 해산당하자 1981년 1월 민주공화당 및 유신정우회 출신 인사들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제11대와 12대 총선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대구 중구 · 서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7년 소속 의원들이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으로 대거 탈당하면서 한국국민당은 1988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등록을 취소당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있던 이만섭은 1990년 1월 3당(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참여하였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14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뒤 제15대 총선에서도 민주자유당이 당명을 바꾼 신한국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만섭은 1997년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되자 이에 반발해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국민신당은 다음해인 1998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하였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으로 재창당하였고, 이만섭은 총재 권한대행으로서 신당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이만섭은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2002년 3월 국회법 개정으로 국회의장이 당적을 가질 수 없게 되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헌정 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되었다. 국회의장 임기가 끝난 후 복당한 그는 2004년 제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2015년 12월 14일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2년 헝가리 십자대훈장, 2011년 제6회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제3회 '대한민국 법률대상 입법부문상 등을 수상하였다. 영결식은 국회장으로 치러졌고,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