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우(朴載雨)는 1918년 9월 26일 경상남도 울산(지금의 울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동래고등학교와 국민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호는 취범(醉凡)이다.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박재우는 대학 졸업 후 부산 동래에서 동래주조주식회사와 명성직물을 경영하였다. 1960년 4 · 19혁명 후 실시된 7 · 29 총선에서 경상남도 참의원 선거에서 혁신 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하였고, 1961년 5 · 16군사쿠데타가 발발한 뒤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63년 2월 27일 해금된 박재우는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신민당에서 박재우는 신한당계로 분류되어 비주류파에 속하였다. 1968년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파벌 재편 작업이 활발해지자 박재우는 김재광(金在光) · 장준하(張俊河) 등과 함께 개혁적 당풍 조성을 주장하며 신진회를 조직하였다.
1969년에는 7월 17일 신민당과 재야 세력이 규합하여 결성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재우는 이로 인해 운영하는 업체가 강도 높은 세무 사찰을 받는 보복을 당하였다. 또한, 삼선개헌안이 변칙적으로 통과된 뒤 국회의장 공관을 찾아가 항의하는 과정에서 공관 기물을 파손하였다는 혐의로 입건되기도 하였다.
한편, 1970년 1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박재우는 총재로 정일형(鄭一亨)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유진산(柳珍山)이 선출되었고, 박재우는 장준하와 함께 삼선개헌반대투위 인사 및 각계 재야 인사들과 연합하여 신당운동을 추진하였다.
신당운동 세력은 1970년 6월 8일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민당을 당명으로 정하였다. 준비위원장에는 신민당을 탈당한 윤보선(尹潽善)을 추대하였다. 국민당은 신민당을 공화당 통치체제의 일부라고 비판하면서 ‘선명야당(鮮明野黨)’ 구현을 주창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은 구 신한계와 구민주당 신파계, 혁신계, 장준하와 박재우가 이끄는 청년층, 군소 정당 출신 등으로 그 구성이 복잡하였다.
1971년 3월 22일 제15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박기출(朴己出)이 선출되자 윤보선을 지지하였던 박재우는 장준하와 함께 국민당을 탈퇴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7일 실시된 총선에서 통일사회당 공천으로 부산 동구에서 출마하였다가 후보를 사퇴하였다. 이후 박재우는 1973년 1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총선에서 부산 동래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신민당 이기택(李基澤) 후보와 민주공화당 양찬후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그 후에도 박재우는 민주통일당에서 국토통일위원회 의장, 중앙상무위원회 의장 등을 맡으며 꾸준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실상 정계에서 물러났다. 부산에서 실업에 종사하다가 2005년 5월 26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