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3당은 통합의 원칙에는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은 적당한 준비 기간을 두고 각 당 내부의 견해를 수렴하는 민주적 결당(結黨)을 주장하였다. 반면 조선공산당 간부파는 이미 합당이 결정적이며 정세가 긴박하다는 이유로 먼저 3당 대표들이 연합회의를 열어 합당을 선언하고 강령 초안을 채택하자고 하였다. 결국 좌익 3당은 합당 방식을 둘러싸고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되었다.
먼저 조선공산당에서는 반간부파가 당대회 소집을 주장하며 대회파가 형성되었다. 조선인민당은 무조건 합당을 주장하는 48인파와 민주적 합동 및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친여운형 계열의 31인파로 분열되었다. 조선신민당 역시 적극 추진을 주장하는 중앙파와 신중론의 입장에 선 백남운 중심의 반간부파로 나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간부파는 1946년 9월 4일 여운형과 백남운을 배제한 채 각 당의 무조건 합당파들만 모아 3당합동준비위원회 주1를 개최하고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건부 합당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 대회파와 조선인민당의 31인파, 남조선신민당의 반간부파도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와 분리하여 따로 합당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0월 16일 사회노동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11월 11일 3당연합중앙위원회를 거쳐 11월 17일 정식으로 사회노동당을 발족시켰다.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자 조선공산당 간부파는 비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북조선노동당에서도 사회노동당을 주2자라고 비판하였다. 여운형과 백남운은 이에 대응해 사회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의 무조건 합동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노동당은 이를 거부하고 사회노동당의 해체와 개별 포섭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계획대로 11월 23~24일 남조선노동당결당대회를 열었다. 사회노동당은 12월 1일 '미소공동위원회속개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세를 과시함으로써 남조선노동당에 통합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중동원에 실패하였고, 결국 12월 4일 여운형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백남운도 12월 7일 은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계속해서 조선인민당 31인파의 황진남 등이 조선인민당 복귀를 공식화했으며, 1947년 1월 28일에는 조선공산당 대회파를 이끌던 강진이 탈퇴를 성명하였다. 이로써 사회노동당은 해체가 불가피해졌다. 1947년 2월 27일 열린 사회노동당 제1회 당대회는 "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는 자기비판과 함께 당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좌익 3당 합동은 남조선노동당 결성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남조선노동당은 조선인민당이나 남조선신민당원 뿐만 아니라 과거 조선공산당원들조차 모두 포괄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남조선노동당과 별개로 새로운 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생겨났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과거 사회노동당계가 광범위한 민주세력의 집결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신당 결성 공작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1947년 4월 12일 신당의 명칭을 근로인민당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5월 24일 창당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과 이영, 장건상을 선출하였다.
사회노동당은 좌익 3당의 통합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간부파의 독선적 추진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모여 결성하였다. 대중동원력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북조선노동당이 남조선노동당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분열의 책임을 지고 해체되었지만, 이후 남조선노동당이 포괄하지 못하는 좌익 정치세력을 흡수해 근로인민당을 창당함으로써 이들의 이탈을 막고 좌익 정치 역량을 보존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