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천조천록 ()

선사포/항해조천도
선사포/항해조천도
고전시가
작품
1624년 6월부터 1625년 10월까지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의 주청사행을 기록한 한문 사행록.
정의
1624년 6월부터 1625년 10월까지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의 주청사행을 기록한 한문 사행록.
구성 및 형식

북경으로 출발하기 위해 임금에게 하직을 고한 1624년 6월 20일부터 귀국 후 대간(臺諫)의 탄핵을 왕으로부터 사면받은 10월 5일까지 1년여의 기간 동안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전편을 구성했다. 내용 전체를 사건 중심으로 요약하면 ‘북경에서 천신만고 끝에 천자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낸 부분(사건 1)─북경을 출발하여 해로로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부분(사건 2)─귀국 이후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고난을 받다가 천신만고 끝에 형벌을 면하는 부분(사건 3)’ 등 세 종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서사적 구성 양식을 보여 준다.

내용

일정과 내용을 중심으로 죽천의 사행을 기록하고 있는 세 기록들(『죽천행록』·『죽천조천록』·『화포선생 조천항해록』)을 비교·대조한 결과 『죽천조천록』은 『죽천행록』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따라서 죽천의 외손 민상사(閔上舍)가 부사 오숙의 집에서 얻었다는 『조천언록(朝天諺錄)』 즉 국문본 『조천록』이 바로 『죽천행록』이고, 『죽천행록』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죽천조천록』이다. 말하자면 죽천 사행에 관한 기록으로는 국문본이 원본이고, 그 원본을 번역한 것이 『죽천조천록』이며, 서장관 홍익한의 『화포선생 조천항해록』은 별도로 만든 공식 보고문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죽천행록』은 기록자가 밝혀져 있지도 않고, 기록자를 추정할 만한 단서 또한 없다. 그러나 『죽천행록』을 『죽천조천록』으로 번역한 사람은 죽천의 외손인 ‘민상사’라고 했는데, 이 인물의 신원 또한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사행에 관한 공식적인 보고문은 서장관이 도맡던 임무였고, 자제군관이나 나머지 인원들은 흔히 비공식적인 기록들을 남겼다. 따라서 홍익한의 『화포선생 조천항해록』은 매우 평면적이고 딱딱한 일정 보고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데, 미묘한 내용들은 생략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모습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록자를 밝히지 않은 『죽천행록』은 북경에서 벌인 외교 활동들을 낱낱이 사실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일종의 서사적 긴박감을 느끼게 한다. 노구(老軀)의 상사(上使) 죽천이 명나라의 하급 관리들에게 당하는 수모를 하나도 생략하지 않은 채 세밀히 묘사했고, 명나라 말기 관료 사회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그려 내는 등 일반적인 사행록의 범주나 한계를 넘어서는 기록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국문으로 기록함으로써 한문으로 기록했다면 살려 내지 못했을 미세한 감정의 흐름까지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천행록』과 『죽천조천록』은 다른 연행록들에서 발견할 수 없는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주인공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방해자들은 요소마다 포진하여 주인공과 대결하며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다. 주인공과 방해자들 사이에서 조성되는 것은 갈등과 긴장이다. 부정적이고 탐욕스런 좌시랑 주호경이 등장함으로써 빚어진 것이 갈등 1이고, 주청사의 예단을 두고 양측이 보인 견해의 차이는 갈등 1로부터 파생된 갈등 2였다. 이와 함께 당시 중국의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위대중이 조선 사신들의 현실적 방해자로 등장하여 빚어진 것이 갈등 3이었고, 갈등 1·2를 통해 향후 새로운 갈등의 핵이 될 것을 암시한 좌시랑 주호경이 본격적인 방해자로 등장하여 빚어진 것이 갈등 4였으며, 적극적 조력자였던 예부상서 장세정이 떠나고 탐욕스런 임요유가 새로운 방해자로 등장하여 빚어진 것이 갈등 5였다. 육각로가 새로운 방해자로 등장한 것이 갈등 6이었고, 새로운 방해자 임상서의 등장이 갈등 7이었으며, 모든 갈등과 장애의 제거로 문제가 해결되려는 순간 갈등 6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모문룡의 서찰이 다시 새로운 갈등 8로 돌출했다. 이 국면에서 더욱 많은 뇌물을 공여함으로써 임요유는 조력자로 바뀌어 갈등 8은 해결되었고, 조선의 사신들은 결국 천자의 고명과 면복을 받게 된 것이다.

사건 2는 해로를 통해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부분이다. 북경에서 등주까지는 육로였으나 등주로부터 해로 사행의 출발점이었던 선사포까지는 잦은 풍랑과 기후의 변화로 인해 목숨을 건 노정이었다. 그들이 선사포에 도착했다는 것은 1차적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체제와 인위의 장벽, 혹은 그것들이 조성하는 긴장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하고, 2차적으로는 끊임없이 생을 위협하던 거대한 자연의 위력과 그것이 조성하던 긴장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사신 일행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했고, 임무를 완수하여 임금에게 충성했다는 대의명분 또한 빛낼 수 있었다는 것, 말하자면 성공적인 사행 길 그 자체를 의미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고명과 면복을 받은 것으로 표면적인 임무는 완수했으되, 사신들에게 닥쳐오는 국내의 질시와 무고, 모략 등은 그들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시련과 갈등 요인이었고, 이것이 바로 제3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현황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의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명나라로부터 받아내기 위한 죽천의 주청사행을 기록한 세 종류의 글들 가운데 『죽천조천록』은 특이한 자료다. 죽천의 후손 이제한(李濟翰)은 『죽천조천록』의 발문에서, 죽천을 비롯한 사신들이 북경에서 벌인 외교 활동과 오고가던 해로(海路)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기록한 글이 있었으나, 병자호란의 와중에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러다가 죽천의 외손 민상사가 ‘조천언록(朝天諺錄)’을 죽천사행에 부사(副使)로 참여했던 천파(天坡) 오공(吳公) 즉 오숙(吳䎘)의 집에서 얻어, 그 음과 뜻에 의거하여 문자(文字)로 번역하니 그로부터 그 본(本)(『죽천조천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죽천행록』은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국문 사행록이고, 『죽천조천록』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한문 사행록이다. 양자는 기록의 대상이 분명하고 갈등과 문제 해결의 과정이 뚜렷할 뿐 아니라 내용의 사실성과 함께 문학성 또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사행록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7세기 국문 사행록 죽천행록』(조규익, 박이정, 2002)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조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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