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은 목판에 글씨나 그림 등을 새겨서 간행하는 행위를 뜻한다. 누판(鏤板)은 목판에 글이나 그림 등을 새기는 행위 또는 글이나 그림 등이 판각된 목판을 뜻하는데, 주로 인출하기에 앞서 목판에 새긴 책판을 의미한다.
1796년(정조 20)에 간행된 『누판고(鏤板考)』는 조선시대의 목판 제작 및 지역별 분포 상황을 확인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한가지이다. 『누판고』에는 어찬(御撰) 20종, 어정(御定) 46종, 경부(經部) 47종, 사부(史部) 74종, 자부(子部) 119종, 집부(集部) 304종 등 총 610종이 수록되어 있다. 『누판고』에는 목판의 내용과 목판을 제작한 주체, 목판이 인쇄된 지역의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누판고』를 전체적으로 보면 정부 관서가 목판 인쇄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점과 민간에서 목판 인쇄를 하는 경우 집부(集部), 즉 개인 문집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앙 관서판 11개처 80종을 제외하고 지역을 기준으로 개판처(改板處)를 나누었을 때 경상도에 관서, 서원, 사찰, 사가 등 모든 경우에 개판처가 가장 많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지역의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이는 목판 인쇄가 유교적 정신 가치의 공유 및 확산과 독특한 지역문화의 형성에 기여한 측면을 과소평가한 해석이다.
목판으로 인쇄한 문헌의 저자들은 퇴계 이황에 학문적 연원을 두면서 영남지역의 유교 문화를 형성했던 주역들이었다. 이들은 노론(老論)이 집권하던 조선 후기에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지만 주리론(主理論)에 바탕한 영남 유학의 독자적 학풍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문헌의 왕성한 생산과 보급을 통해 정신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영남지역의 유학자들이 목판 인쇄를 선호한 것은 보관과 관리가 편리하고 책을 인출한 후에도 판의 해체가 불가능하여 장기 보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선조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을 영구히 보존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도 목판 인쇄가 빈번하게 이루어진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