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실록자는 조선 전기, 제9대 왕인 성종의 재위 기간 동안에 일어난 정치, 외교, 국방,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年月日)의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한 역사서인 실록을 찍을 때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목활자이다. 이 활자로 찍은 성종의 실록은 1469년 11월 28일부터 1494년 12월 24일까지 재위 25년 2개월간의 역사를 수록하였다. 전체 297권 47책이며 『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이 이 실록의 정식 명칭이다.
이 실록의 편찬은 성종이 승하한 지 4개월 뒤인 1495년(연산군 1) 4월에 시작되었다. 당시 영의정 노사신(盧思愼) 등의 건의로 실록의 편찬기관인 춘추관(春秋館) 안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실록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 실록과 관계된 중요한 정치 사건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있다. 무오사화는 실록 편찬 도중이던 1498년(연산군 4)에 성종 대에 사관(史官)을 지냈던 김일손(金馹孫)이 실록청에 보낸 사초(史草) 가운데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여 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화술주시(和述酒詩)」가 실려 있는 것이 발단이 된 것으로, 이 일로 신진 사림들이 큰 화를 당하였다. 그러나 실록의 편찬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1499년 3월에 인쇄를 마친 후, 4사고(史庫)에 발간된 실록을 봉안하였다.
이 실록의 편찬 작업에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과 우의정 성준(成俊)이 총재관(總裁官), 지관사(知館事) 이극돈(李克敦) 이하 동지관사 안침(安琛) 등 15명이 실록청 당상(堂上)으로, 편수관 표연말(表沿沫) 이하 74명이 모두 실록청 낭청(郎廳)이 되어 참여하였다.
조선의 역대 실록은 모두 완성된 후 자료가 되었던 사초들을 모두 씻어서 없애는 세초(洗草)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중 『성종실록』은 이러한 1499년 편찬을 마친 후 세초의 과정과 전말을 적은 기록물인 『성묘보전세초록(成廟寶典洗草錄)』이 남아 전하고 있다. 『성종실록』은 이 시기가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한 조선시대의 문물 제도가 확립된 시기였으므로 당시의 역사 기록의 가치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실록을 찍어내는 데 사용된 활자는 기본적으로 1434년에 세종 때 처음 주조된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에 보충한 활자를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초기의 갑인자는 글자가 바르고 단정하여 자주 가주(加鑄)와 보주(補鑄) 그리고 개주가 이루어지면서 조선 말기까지 갑인자 활자가 인쇄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처음 활자가 주조된 이후 사용을 거듭함에 따라 부족해진 글자나 망실된 활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가주 또는 보주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실록을 찍을 때 사용된 초주갑인자 또한 그러하였는데, 그 중 대규모적인 것은 연산군 5년(1499)에 『성종실록』을 찍을 때와 중종 10년(1515) 11월에 닳고 이지러진 것을 대체하기 위해서 이루진 것이다. 조선 후기까지 포함하여 활자의 완전한 개주는 여섯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도 모자라는 활자는 수시로 보충이 이루어져 사용되었다.
이 활자 즉 1499년에 『성종실록』을 찍기 위하여 가주, 보주로 보충된 이 활자에 대하여 김두종은 그의 저서 『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에서 ‘성종실록자’라 명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천혜봉은 『한국전적인쇄사(韓國典籍印刷史)』에서 그 활자의 자체가 엄연히 갑인자이고 그 가운데에는 마멸된 처음 주조되었던 활자가 적지 않게 섞여있어서 굳이 성종실록자로 별도의 명칭이 필요 없을 것으로 보았다. 결국 이 활자의 용어는 용도나 주조 범위를 중심으로 명칭을 부여한 미시적인 관점과 초기 갑인자의 상황별 보충이라는 관점과의 차이로 달라진다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