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加鑄)는 ‘덧보태어 주조한다’라는 뜻으로 주로 동전이나 구리, 금속활자를 주조한 후 발생하는 수요에 대하여 추가로 주조하는 것을 말한다. 동전은 통용되는 수량이 많았던 까닭에 당초의 주조된 수량 외에 시간적 흐름에 따른 추가나 필요한 수요가 발생하여 이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더 주조할 필요가 발생할 때 가주를 하였다. 다만 이때 동전의 무게나 크기가 달라짐을 유의해야 한다는 논의가 많았다. 반면 금속활자의 경우, 이미 오래 사용한 활자의 글자는 이지러져 글자를 찍어 내었을 때 획이 가늘어지고 둔탁해져서 처음의 서체와 차이가 많이 나는 점을 우려하는 사례가 많았다.
처음 주조할 때 금속활자의 전체 수량이 적어서 목활자나 다른 서체의 활자로 조판하면, 제대로 통일되고 일관된 모습의 인쇄나 출판을 할 수 없고 활자의 조판도 힘들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비교적 큰 규모의 추가적인 주조를 하는 것이 가주의 가장 큰 목적이다. 그밖에 활자를 보충하는 경우는 주조된 글자가 부분적으로 부족하거나 관리가 소홀하여 분실이나 유실되는 경우인데, 이는 ‘보주(補鑄)’의 범주에 들어간다.
동전의 ‘가주’에 대한 사례로는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9년 1785년 7월 13일조의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돈을 주조하는 위치를 정할 때 동철(銅鐵)의 수급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지방 기관에서 ‘가주’하여 신국(新局)의 동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임을 밝히고 새롭게 주조하는 것에 반대하는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일성록』 정조 13년(1789) 4월 20일에도 동전의 주조에 대하여 주전당상(鑄錢堂上) 서유린(徐有隣)이 이미 통용되던 90만량에 10만량을 ‘가주’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말하면서 매년 가을과 겨울에 구리와 철을 모아 주조하는 것을 논의한 기록이 있다.
순조(純祖) 16년(1816) 7월 4일의 『일성록』 기상에서 동전의 단위별 편리성을 논하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던 당10전이 편리하지만 여기에 당50전을 ‘가주’하는 것이 변통의 수단으로 바람직할 것이라 논의되어 왔다는 등의 사례가 있다. 이는 동전에 대한 대규모 추가 주조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종 18년(1881) 1월 7일에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도장 1과를 은으로 ‘가주’하라는 명을 예조에 내린 기록이 있는데, 이 경우는 규모는 작지만 도장은 독립된 단위로 구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활자의 관련 기록으로는 『일성록』 정조 14년(1790) 3월 23일에 정민시(鄭民始)가 규장각(奎章閣)에 소장하고 있는 활자가 비록 수량은 많지만 부족하여 불가불 ‘가주’하여 보충하여 한다고 하면서 호조가 수장하고 있는 왜동(倭銅) 1300근, 유랍(鍮鑞) 300근 등을 동원하자는 건의에 대한 기록이 있다.
또 『일성록』 정조 20년(1796) 12월 15일에 정조가 동궁시에 세종조의 갑인자를 자본으로 하여 15만자를 주조하여 「경서정문(經書正文)」을 찍었고 즉위한 1776년 정유에 갑인자를 자본을 하여 15만자를 ‘가주’하여 내각에 수장케 하고 『팔자백선(八子百選)』과 『경서대전(經書大全)』을 찍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앞서의 15만자는 임진자(壬辰字)를 의미하고 뒤의 15만자는 정유자(丁酉字)를 가리킨다. 이 기록은 대규모의 단위와 시간적으로 5년의 차이가 있고 서로 다른 활자라 실질적으로 신주(新鑄)에 해당하지만, 그 계통이 갑인자 계열로 같은 서체인 경우에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가주’의 범주로 설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