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활자(鉛活字)는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1436년(丙辰)에 주자소(鑄字所)에서 납(鉛)을 녹여 만든 병진자(丙辰字) 금속활자이다. 『자치통감강목』 139권의 주조와 인쇄에서 대자(大字)인 병진자가 쓰인 바 있다. 병진자는 세계 최초의 연활자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세종(世宗, 13971450)은 이계전(李季甸, 14041459) · 김문(金汶)에게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게 하고, 이를 간행하고자 진양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 훗날 世祖)에게 ‘큰 글자[大字]의 자본(字本)’을 쓰게 하여 ‘강(綱)’을 삼아 바탕(底本)으로 하여, 이에 납(鉛)을 녹여 대자(大字) 활자를 새로 주성(鑄成)한 것이 바로 병진자(丙辰字, 1436)이다.
병진자의 활자 크기는 크고 작은 것에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세로 2.3cm, 가로 2.9cm, 높이 0.7~0.9cm’의 크기로 추정된다. 『자치통감강목』의 인쇄에서 중간 글자에 해당하는 ‘목(目)’의 인쇄에 동원된 옛 글자는 갑인자(甲寅字)의 중자(中字: 1.5×1.5×0.7cm)와 소자(小字)가 사용되었다. 『자치통감강목』의 주조와 인쇄에서는 대자인 병진자가 쓰인 바 있다. 『자치통감강목』 139권은 워낙 거질(巨帙)이라 그 인쇄 · 간행은 1438년에 완료되었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거의 모두 동활자(銅活字)로 주조(鑄造)되었다. 조선 초기의 계미자(癸未字),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 계열 활자들을 비롯하여 을해자(乙亥字) 등등이 모두 동활자이다. 『자치통감강목』 총 139권의 큰 글자인 병진자만 유일하게 납을 녹여 만든 연활자임이 주목된다. 연활자의 재료인 납은 용해(溶解)되는 온도가 낮아 큰 활자인 대자의 주조에 용이한 장점이 있다. 그러나 납은 그 강도가 단단하지 못하고 물러서 조선 초기 금속활자의 주조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진자(丙辰字)’라는 큰 글자를 주조하는 데에 납이 쓰인 것은 눈여겨 볼만한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치통감강목』이라는 거질(巨帙)의 인쇄에 필요한 대자를 주조하는 데 소요되는 대량의 금속 물량(物量)을 납으로 조달하는 방안이 훨씬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에 채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448년(세종 30)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인쇄하여 반포할 때, 한글과 한자의 대자는 모두 목활자(木活字)를 사용하였다는 점 또한 주목되는 사항이다.
한국의 금속활자는 일반적으로 동활자를 주조하여 아름다운 책을 제작하였다. 세종 시대의 갑인자(甲寅字)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세종 시대에 거질(巨帙)의 『자치통감강목』 139권을 인쇄하는 데 필요한 큰 글자를 특별하게 대량으로 주조하기 위하여, 납(鉛)을 투입하여 병진자(丙辰字)를 주성(鑄成)한 사례는 크게 주목된다. 납은 그 강도가 너무 무르기 때문에 세종 당시 등 금속활자의 주조에는 간택되지 못하였던 금속이다. 당시 갑인자 동활자를 주조하였던 탁월한 기술로 연활자(鉛活字)인 병진자의 주성에도 성공하였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병진자의 주성(436) 이후 조선의 금속활자 주조에서 납(鉛)이 그 재료로 선택된 사례는 다시 찾아볼 수 없다. 19세기 말기에 와서야 신연활자(新鉛活字)가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진자는 세계 최초의 연활자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신연활자는 19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1880년에 일본에서 최지혁(崔智爀)의 글씨를 바탕으로 신연활자가 주조되었고, 이 활자를 기반으로 1883년에 박문국(博文局)이 설치되고 신문 · 서책 등이 광범위하게 인출되었다. 이에 따라 지배 계층뿐만 아니라 서민 계층까지 인쇄 · 출판의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국민의 계몽과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따라서, ‘연활자’와 ‘신연활자’는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