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우리는 활자 인쇄상에 있어서 조판을 할 때 활자를 끼워서 조립, 배열하는 금속제 틀이다. 우리의 종류에는 철우리를 비롯하여 목활자 인쇄에 사용하는 목우리 등이 있다. 또 같은 유형이지만 활자를 끼우는 것이 아니라 필사본을 쓸 때의 양식지를 찍어내는 역할을 하는 쇠나 나무로 만든 인찰판(印札板)도 있다.
철우리(鐵亐里)는 활자 인쇄 과정에서 조판을 할 때 활자를 끼워서 조립하고 배열하는 금속제 틀을 말한다. 우리(亐里)의 종류에는 철우리를 비롯하여 목활자 인쇄에 사용하는 목우리 등이 있다. 또 같은 유형이지만 활자를 끼우는 것이 아니라 필사본을 쓸 때의 양식지를 찍어내는 역할을 하는 쇠나 나무로 만든 인찰판(印札板)도 있다.
조선시대 19세기 초에 작성된 주자소의 편람 및 개요서인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당시까지 주자소에 남아 있었던 여러 활자와 활자 보관 용기인 활자장, 목판에 새긴 책들의 목록, 보관하고 있던 책과 더불어 조판틀인 우리의 목록과 수량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철우리에 대한 기록은 위부인자(衛夫人字) 철우리 30판(10행 18자), 한구자(韓構字) 철우리 12판(10행 20자), 생생자(生生字) 철우리 25판(10행 20자), 정리자(整理字) 철우리 30판(10행 20자) 등과 같이 각각의 활자들을 조판하는 틀의 수와 각 틀의 조판상의 형식을 구분하여 기록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 가운데 위부인자 철우리는 13판이 외각 즉 교서관에 있고 생생자의 경우 25판 외에 철우리 20판(10행 18자), 작은 판 우리 10판(10행 22자)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정리의궤(整理儀軌)』 철 · 목우리 15판(12행 22자), 어제(御製) 철우리 2좌(坐)(10행 20자) 등과 같은 특정 책을 찍어낼 때 사용한 철우리에 대한 기록과 함께 활자 인쇄가 아니라 필사본을 쓰기 위한 일종의 양식판으로 『일성록(日省錄)』 인찰판(印札板)(10행 20자) 1좌, 『오경백편(五經百篇)』 목인찰판(7행) 1좌, 『실록(實錄)』 철인찰판(15행) 1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생생자의 작은 우리판 중 5판의 인찰은 『분운(分韻)』의 작은 판을 만들 때 잘라서 사용하고 『정리의궤』 철 · 목우리 15판 중에 8좌도 『두율분운(杜律分韻)』의 작은 판을 찍을 때 사용하였다. 이 우리와 유사한 명칭으로 조선 후기에 실록을 찍을 때의 문서나 절차, 소요 물품 등 각종 기록을 적은 의궤류(儀軌類)에서는 조판하는 바닥 틀을 위리(圍里)라는 용어로 사용하였고 인찰의 경우도 동인찰(銅印札) 등으로 재료를 표기하고 있다.
실록의 경우 조판과 인출에 관련된 기구 중에는 위리의 용도로 넓은 송판의 숫자와 함께 매 판의 동인찰의 수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아, 이 때의 위리는 조판의 전체 틀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절차로 볼 때 글자를 원고대로 1차 배열하는 데 사용되는 활자를 가려 뽑은 균자판(均字板)에서 철우리가 고정된 조판대 위에서 조판의 작업을 거친 후 먹을 바르고 찍어내는 인출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철우리를 만드는 재료로는 정철(正鐵), 숙동(熟銅), 유랍(鍮鑞) 등이 사용되었고, 철우리 구조는 테두리, 행간을 구분하는 동인찰 등이 일체형으로 조합된 것과 분리형으로 조판 사용 시 조합하여 사용하는 형태가 있다.
현존하는 고려 금속활자인 『직지(直指)』 하권의 경우 전체로 보면 모양이 다른 2개 철우리 또는 조판틀이 번갈아 사용되었고 현존 활자본들을 조사해 보면 조선 초기의 활자판들에서는 5~6개의 판이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후의 판본들에서는 10판 이상이 사용되었다. 이는 여러 장을 동시에 조판하여 번갈아 인출하여 출판의 신속성과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실록 등을 찍을 때 간혹 만들거나 사용한 철우리 책판은 교서관(校書館)으로 보내어 보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