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7월 3일 전라남도 광양군 다압면(多鴨面) 신원리(新院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무렵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 거주하였고, 당시 직업은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다. 수피아여학교는 이곳 교사 출신인 김마리아가 일본에서 갖고 들어온 2·8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6일, 전라남도 나주 출신의 김복현(金福鉉)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을 가지고 광주에 왔다. 그는 김강(金剛), 송흥진(宋興鎭), 서정희(徐廷禧),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俊) 등과 3월 10일에 광주 시내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모의하였다. 이후 김강이 수피아여학교 교사인 박애순(朴愛順)에게 연락하여 학생 동원과 독립선언서 등의 배포를 부탁하였다.
3월 10일 점심, 진신애는 동료 교사인 박애순과 함께 김강에게 받은 독립선언서 등을 학생 60여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오후에 박애순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 장소인 부동교(不動橋)로 출발하였다. 이날 부동교 아래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학생을 포함해 1,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송흥진이 ‘조선독립만세’가 쓰인 대형 태극기 깃발을 들었고, 김복현, 김강, 서정희, 최병준 등은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통과 본정통을 거쳐 북문 밖에 이르렀고, 여기서 광주농업학교 학생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진신애는 수피아여학교 교사, 학생들과 함께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오후 5시경 헌병들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고, 시위 주동자와 참여자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진신애도 이때 박애순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11월 23일 광주여자청년회가 결성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