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헌종 12)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에서 어기우(魚沂愚)와 파평 윤씨(坡平 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필(公弼)이고, 호는 심재(心齋)이다.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에 입각한 위정척사 계열 유학자이다.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인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1883년 4월에 고덕리를 떠나 연풍(延豐, 현 충청북도 괴산군) 문산(汶山)으로 갔다가 진천으로 이주하였다. 인근 목천에서 강학(講學)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등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제천 장담(長潭)에서 강학하던 화서학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인 유인석은 1895년 12월 주1의 기치를 내걸고 제천의병을 일으켰다. 어윤석은 1896년에 아들 어경선(魚敬善)과 함께 유인석 부대에 참여하였다.
유인석 의병부대는 한때 3,000여 명을 넘었으며, 제천과 충주, 원주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격에 패한 뒤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유인석은 휘하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어윤석은 유인석과 동행하려 하였으나, 다리에 병이 생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아들 어경선이 유인석과 동행하였다. 어윤석은 1897년 5월 유인석의 문인 이면재(李冕宰)와 교류하였으며, 다음 해인 1898년 병사하였다.
어윤석은 의병장인 안진경(顏眞卿)과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예를 들어 의병에 불참한 유학자들을 비판하였다. 동문이었던 노정섭(盧正燮)이 “도적을 피하는 세 가지 계책을 사람들에게 말하길 궁곡(窮谷) 심산(深山)에서 독서하고 농사짓는 것이 상책이요, 어버이를 모시고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함이 중책이고, 출세하기 위하여 번거롭게 움직여 종같이 따르고 짐승같이 끌려다니며 사는 것이 하책이다”라면서 현실에서 도피하자, 유학자들이 이상한 말을 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킨다고 비판하였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