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때까지는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지 않고 집에서 한문과 유교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일본에 유학하여 최고등 학문을 전수하여 조국의 창유(創有)한 여자사범이 돼라”는 권유를 받고 1898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하란사(河蘭史)에 이은 두 번째 일본 여자 유학생이었다. 1898년 여름 도쿄[東京] 메이지여학교[明治女學校] 보통과에 입학한 데 이어, 1905년 고등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메이지여학교 고등과는 여성이 대학에 입학할 수 없던 당시에는 사실상 여성 고등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1905년 10월에는 주1에서 영어와 음악을 공부하였다. 이 밖에도 도쿄여자음악원에서 음악, 도시샤병원[同志社病院]의 교토간병부학교[京都看病婦學校]에서 간호사 업무, 주2에서 수예를 배웠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는 2년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에서 서구 문물을 직접 체험하였다. 1909년에는 일본 유학 중에 사귄 같은 일본 유학생 출신 최석하(崔錫夏)와 결혼하였다. 최석하는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와 태극학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생 시절에 태극학회 기관지 『태극학보』에 발표한 몇 편의 글[「본국 제형 제매에게」, 「추풍일지」, 「공경의 정신」, 「헌신적 정신」]을 통해 '국민의 어머니, 사회의 꽃, 인류의 태양'인 여성이 국민의 일원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을 받아 지식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역설하였다. 여성의 근대적 자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한 최초의 논의였다. 특히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적 도덕으로 공경과 겸손의 정신, 단결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여학계 태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09년 최초의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에 9품 직급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1년 전에 교수로 임명된 이동초(李東初)에 이은 두 번째 여성 교수였다. 1909년 5월에 열린 운동회에서 달리기, 뜀뛰기, 공 던지기, 맨손 체조, 그네뛰기 등의 훈련과 연습을 직접 지도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6품 직급의 교수로 승진시키려고 하였지만, 사직서를 제출하고 1910년 말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남편이 병으로 먼저 사망한 뒤에는 음악 및 외국어 개인 교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독립운동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1926년 베이징[北京]에서 이른바 창조파가 민족유일당운동을 벌일 때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의 선언서 작성과 발표에 동참하였다. 해방 무렵인 1945년 6월까지 중국에 살고 있었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