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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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일본과 유럽에서 유학하고 관립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로 근무하며 여성 교육과 계몽에 힘쓴 여성 교육가.
이칭
이명
다이라 사다코[平貞子], 윤동매(尹東梅), 윤동매(尹東梅)
아호
남휘(藍輝), 남휘(藍輝)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83년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파평(坡平)
출생지
서울
주요 경력
한성고등여학교 교수
관련 사건
민족유일당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윤정원은 대한제국~일제강점기에 일본과 유럽에서 유학하고 관립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로 근무하며 여성 교육과 계몽에 힘쓴 여성 교육가이다. 1세대 여자 유학생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이다. 여성 교육의 중요성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여성 교육 기관인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목차
정의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일본과 유럽에서 유학하고 관립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로 근무하며 여성 교육과 계몽에 힘쓴 여성 교육가.
인적사항

188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아호는 남휘(藍輝)이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시기에 독립협회,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에서 활동한 윤효정(尹孝定)이다. 일본 유학생 시절에는 다이라 사다코[平貞子],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윤동매(尹東梅) 등의 이명을 썼다.

주요 활동

16세 때까지는 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지 않고 집에서 한문과 유교 교육을 받았다.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일본에 유학하여 최고등 학문을 전수하여 조국의 창유(創有)한 여자사범이 돼라”는 권유를 받고 1898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하란사(河蘭史)에 이은 두 번째 일본 여자 유학생이었다. 1898년 여름 도쿄[東京] 메이지여학교[明治女學校] 보통과에 입학한 데 이어, 1905년 고등과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메이지여학교 고등과는 여성이 대학에 입학할 수 없던 당시에는 사실상 여성 고등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1905년 10월에는 주1에서 영어와 음악을 공부하였다. 이 밖에도 도쿄여자음악원에서 음악, 도시샤병원[同志社病院]의 교토간병부학교[京都看病婦學校]에서 간호사 업무, 주2에서 수예를 배웠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는 2년 동안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에서 서구 문물을 직접 체험하였다. 1909년에는 일본 유학 중에 사귄 같은 일본 유학생 출신 최석하(崔錫夏)와 결혼하였다. 최석하는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태극학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생 시절에 태극학회 기관지 『태극학보』에 발표한 몇 편의 글[「본국 제형 제매에게」, 「추풍일지」, 「공경의 정신」, 「헌신적 정신」]을 통해 '국민의 어머니, 사회의 꽃, 인류의 태양'인 여성이 국민의 일원으로 사회에 기여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을 받아 지식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역설하였다. 여성의 근대적 자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한 최초의 논의였다. 특히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민적 도덕으로 공경과 겸손의 정신, 단결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여학계 태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09년 최초의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에 9품 직급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1년 전에 교수로 임명된 이동초(李東初)에 이은 두 번째 여성 교수였다. 1909년 5월에 열린 운동회에서 달리기, 뜀뛰기, 공 던지기, 맨손 체조, 그네뛰기 등의 훈련과 연습을 직접 지도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6품 직급의 교수로 승진시키려고 하였지만, 사직서를 제출하고 1910년 말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남편이 병으로 먼저 사망한 뒤에는 음악 및 외국어 개인 교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독립운동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1926년 베이징[北京]에서 이른바 창조파민족유일당운동을 벌일 때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의 선언서 작성과 발표에 동참하였다. 해방 무렵인 1945년 6월까지 중국에 살고 있었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원전

윤정애, 「헌신적 정신」(『태극학보』 7, 태극학회, 1907)
윤정애, 「본국 제형 졔매에게」(『태극학보』 2, 태극학회, 1906)
윤정원, 「공겸의 정신」(『태극학보』 4, 태극학회, 1906)

단행본

김경일, 신영숙, 정현주, 이상경, 김성은, 김은경, 박정애,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5)
최은희, 『한국개화여성열전』(정음사, 1985)

논문

김성은, 「신여성 윤정원의 현실인식과 사회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 67, 한국근현대사학회, 2013)
조규태, 「1920년대 중반 재북경 창조파의 민족유일당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 3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3)
주석
주1

지금의 도쿄여자대학[東京女子大學].

주2

지금의 지센여자대학[實踐女子大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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