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영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39년 2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여 중국인들에게 일본의 침략상을 알렸다. 이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제3지대 간부로 푸양에서 초모활동을 비롯한 각종 공작 활동을 수행하였다. 1944년 11월에는 신송식과 함께 푸양의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졸업생 50여 명을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으로 인솔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어무현[額穆縣]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원삼면(遠三面) 죽릉리(竹陵里) 어현동(於峴洞)이다. 할아버지는 한말 의병으로 활동한 오인수(吳寅秀)이고,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 교관, 서로군정서 경비대장, 한국독립당 의용군 중대장 등을 역임한 오광선(吳光鮮)이다. 어머니는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 결성에 참여하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활동한 정현숙(鄭賢淑)이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대원으로 활동한 오희옥과는 자매지간이다. 남편은 한국광복군 창령참모,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비서 등을 역임한 신송식(申松植)이다. 오희옥의 회고에 따르면 본래 1925년에 태어났는데, 오광선의 착오로 1924년생으로 출생신고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린성 류허현[柳河縣] 등지에서 생활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베이징[北京]에서 생활하였으며, 1935년 일본의 대륙 침략이 가시화하자 가족과 함께 난징[南京]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와 함께 충칭[重慶]으로 향하였다. 1939년 2월 류저우[柳州]에서 고운기(高雲起)를 대장으로 하여 설립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독립운동가의 자제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과 함께 중국인들에게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 연극, 노래, 무용 등을 하였다.
이후 충칭에 정착해서 중산중학교(中山中學校)를 다니던 중에 1940년 9월 창설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오희옥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인 교사의 한국인 차별 발언에 격분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입대하였다고 한다. 입대 직후 1937년 베이징에서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오광선을 찾겠다는 목적으로 초모작전에 지원하였다. 1942년 4월 광복군 제3지대에 편성되었으며, 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인솔하에 이복원(李復源), 서파(徐波), 엄홍섭(嚴弘燮), 박영준(朴英俊), 오광심(吳光心), 신송식(申松植) 등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초모활동을 비롯한 각종 공작 활동을 수행하였다.
1944년 11월에는 신송식과 함께 푸양의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졸업생 50여 명을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으로 인솔하였다. 졸업생 중에는 일본군에게 강제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한 장준하, 김준엽을 비롯한 33명의 학도병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5년 1월 이들을 인솔하여 충칭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69년 사망하였으며, 1974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