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경기도 개성부에서 태어났다.
개성 만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고등학교에서 3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약학을 배웠으며, 1935년 의사 시험에 최종 합격하였다.
1930년대에 경성에서 금강제약소를 경영하는 등 제약업으로 성공하였다. 1938년 5월, 개성에 사회사업 기관인 유린관이 개소한다는 소식을 듣고 실비 진찰소 설치비 명목으로 1천만 원의 거금을 희사하였다. 1939년 조선 내 제약 업자들이 모여 조선제약업조합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부조합장을 맡았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위촉한 11명의 고문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2월 귀국 전재동포(戰災同胞)의 보건과 후생에 힘쓰기 위한 국민후생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9년 정부 경제 시책의 자문기관으로 구성된 경제위원회의 실업계 대표로 관여하였다. 같은 해 11월, 한미 민간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 각지의 경제 상황을 시찰하고 유럽을 거쳐 6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1950년 5월에 발족한 한국은행 설립준비위원회에 정부 측, 국회 측 위원들과 함께 민간 측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민주당 구파의 공천을 받아 1960년 제5대 서울시 참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참의원 '민주당 구파 동지회'의 원내총무로 활동하였다. 구파 세력이 신민당 발당준비회를 결성하면서 구성된 국회대책위원회에서 부의장을 맡았으며, 동시에 기획위원회 부의장을 겸하였다. 이어 신당발기전형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3월 신민당 재정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5월 조선상공회의소 신발족 창립총회에 금강제약소 소주로 참여한 이래, 1960년대 초까지 상공회의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49년 9월 서울상공회의소 제1회 의원총회에서 회두(會頭)로 선출되었으며, 1961년 4월 대한상공회의소 정기 의원총회에서 73표 중 66표를 얻어 회장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