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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통일(後三國統一)은 10세기 초에 후삼국 가운데 하나인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흡수하여 통일한 사건이다. 고려는 건국과 함께 친궁예 세력의 반발을 겪으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을 후백제에 빼앗겼는데, 태조 왕건은 호족 연합 정책과 친신라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이를 만회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고창전투 등에서 후백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검에 의해 쫓겨난 후백제의 견훤과 신라의 경순왕이 차례로 고려에 항복하였고, 936년에는 고려가 마침내 후백제를 공격하여 신검의 항복까지 받았다.
후삼국 통일 (後三國 統一)
후삼국통일(後三國統一)은 10세기 초에 후삼국 가운데 하나인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흡수하여 통일한 사건이다. 고려는 건국과 함께 친궁예 세력의 반발을 겪으면서 후삼국의 주도권을 후백제에 빼앗겼는데, 태조 왕건은 호족 연합 정책과 친신라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이를 만회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고창전투 등에서 후백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검에 의해 쫓겨난 후백제의 견훤과 신라의 경순왕이 차례로 고려에 항복하였고, 936년에는 고려가 마침내 후백제를 공격하여 신검의 항복까지 받았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대견훤기고려왕서」, 「경호」 등을 저술한 문인.
최승우 (崔承祐)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대견훤기고려왕서」, 「경호」 등을 저술한 문인.
경순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935년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다투던 경명왕 때부터 경애왕 대에 이르러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 경순왕은 난폭한 견훤의 보호국보다는 왕건에게 투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935년 국가를 고려에 넘길 것을 결의하고 국서를 보냈다. 왕건은 신라를 경주로 고쳐 그의 식읍으로 주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78년에 승하했다.
경순왕 (敬順王)
경순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935년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다투던 경명왕 때부터 경애왕 대에 이르러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 경순왕은 난폭한 견훤의 보호국보다는 왕건에게 투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935년 국가를 고려에 넘길 것을 결의하고 국서를 보냈다. 왕건은 신라를 경주로 고쳐 그의 식읍으로 주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78년에 승하했다.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이다. 신라 말 호족의 대두와 농민 봉기로 인한 혼란 속에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
후삼국시대는 통일신라가 분열되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를 이은 고려 등 3국이 정립하였던 900~936년 시기이다. 신라 말 호족의 대두와 농민 봉기로 인한 혼란 속에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4년 마진, 911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다. 935년 견훤이 고려에 망명하였고,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함으로써 통일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은 한국 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조물성전투는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있었던 싸움이다. 왕건이 즉위한 후 경북 내륙지역이 고려에 복속되자 후백제는 경상북도 죽령 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이 전투는 2차례에 걸쳐 이뤄졌는데, 1차는 924년 후백제가 먼저 공격하였으나 고려에 참패했다. 그 후 견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2차 전투에 나섰고, 고려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는 백제에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이 전투의 결과 경상 지역에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조물성전투 (曹物城戰鬪)
조물성전투는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있었던 싸움이다. 왕건이 즉위한 후 경북 내륙지역이 고려에 복속되자 후백제는 경상북도 죽령 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이 전투는 2차례에 걸쳐 이뤄졌는데, 1차는 924년 후백제가 먼저 공격하였으나 고려에 참패했다. 그 후 견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2차 전투에 나섰고, 고려와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는 백제에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이 전투의 결과 경상 지역에서 후백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후백제의 제2대(재위: 935년~936년) 왕.
신검 (神劍)
후백제의 제2대(재위: 935년~936년) 왕.
후백제는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세운 나라이다. 견훤이 892년에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다가 900년에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후삼국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나라이다. 견훤이 신라 왕경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였으며, 공산동수에서 고려 태조에게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고창전투와 운주성전투에서 패하면서 고려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쫓겨났다가 고려로 귀부하였고, 신검도 일리천전투에서 고려에 항복하였다. 후백제는 2대 45년간 존속하다가 936년에 멸망하였다.
후백제 (後百濟)
후백제는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세운 나라이다. 견훤이 892년에 무진주에서 자립하였다가 900년에 완산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후삼국의 주도권을 다투었던 나라이다. 견훤이 신라 왕경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시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였으며, 공산동수에서 고려 태조에게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고창전투와 운주성전투에서 패하면서 고려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게 쫓겨났다가 고려로 귀부하였고, 신검도 일리천전투에서 고려에 항복하였다. 후백제는 2대 45년간 존속하다가 936년에 멸망하였다.
진성여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87~897년이다. 즉위 초에는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했다. 그러나 숙부이자 남편이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졌고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했다. 원종과 애노의 난도 평정하지 못했고 북원의 양길은 궁예를 시켜 명주를 함락시켰으며, 완산주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894년 당에서 돌아온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897년 헌강왕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해에 죽었다.
진성여왕 (眞聖女王)
진성여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87~897년이다. 즉위 초에는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했다. 그러나 숙부이자 남편이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졌고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했다. 원종과 애노의 난도 평정하지 못했고 북원의 양길은 궁예를 시켜 명주를 함락시켰으며, 완산주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894년 당에서 돌아온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897년 헌강왕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해에 죽었다.
일리천전투는 936년(태조 19)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지방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이다. 이 전투는 고려와 후백제, 신라 간의 전쟁을 종식시킨 후삼국시대 최후의 전투였다. 936년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에서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전투를 벌여 고려군의 일방적인 압승으로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하여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일리천전투 (一利川戰鬪)
일리천전투는 936년(태조 19)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지방에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이다. 이 전투는 고려와 후백제, 신라 간의 전쟁을 종식시킨 후삼국시대 최후의 전투였다. 936년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대)에서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전투를 벌여 고려군의 일방적인 압승으로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하여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양길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 북원을 거점으로 성장한 반신라적인 세력가이다. 892년 부하인 궁예로 하여금 지금의 영서 지방을 공략하도록 하여 차지하였다.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897년에는 국원성 등 30여 성을 세력권으로 하였다.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900년 그의 세력과 세력권은 궁예에게 흡수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
양길 (梁吉)
양길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 북원을 거점으로 성장한 반신라적인 세력가이다. 892년 부하인 궁예로 하여금 지금의 영서 지방을 공략하도록 하여 차지하였다.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897년에는 국원성 등 30여 성을 세력권으로 하였다.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900년 그의 세력과 세력권은 궁예에게 흡수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
금성전투(錦城戰鬪)는 후삼국 시기에 전라도 나주 일원에서 마진(태봉 · 고려)과 후백제가 격돌하였던 전투이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은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나주 회진을 비롯한 중요한 항구가 있었다.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궁예와 그를 이은 왕건과 견훤이 격돌하였다.
금성전투 (錦城戰鬪)
금성전투(錦城戰鬪)는 후삼국 시기에 전라도 나주 일원에서 마진(태봉 · 고려)과 후백제가 격돌하였던 전투이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은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나주 회진을 비롯한 중요한 항구가 있었다. 이곳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궁예와 그를 이은 왕건과 견훤이 격돌하였다.
927년(고려 태조 10)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후백제견훤(甄萱)과 태조 왕건(王建)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
공산전투 (公山戰鬪)
927년(고려 태조 10)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후백제견훤(甄萱)과 태조 왕건(王建)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
고창전투는 후삼국시대 고창군에서 경순왕 4년(930년)에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두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고창군은 현재 안동 지역으로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지였다. 이미 공산전투에서 고려에 대승을 거둔 후백제 견훤은 고창군까지 도달하여 고려 왕건과 싸웠으나 8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왕건의 승리는 고창군 재지호족의 적극적 협조로 가능하였다. 패배한 후백제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인근 고을과 동해안 일대 성주가 고려에 귀부하였고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고창전투 (古昌戰鬪)
고창전투는 후삼국시대 고창군에서 경순왕 4년(930년)에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가 대승을 거두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였다. 고창군은 현재 안동 지역으로 고려와 후백제의 격전지였다. 이미 공산전투에서 고려에 대승을 거둔 후백제 견훤은 고창군까지 도달하여 고려 왕건과 싸웠으나 8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였다. 왕건의 승리는 고창군 재지호족의 적극적 협조로 가능하였다. 패배한 후백제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인근 고을과 동해안 일대 성주가 고려에 귀부하였고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남북국시대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인 호족.
아자개 (阿玆蓋)
남북국시대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인 호족.
고려전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공헌한 장수.
박영규 (朴英規)
고려전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공헌한 장수.
남북국시대 때, 후백제의 왕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넷째 아들 금강을 살해한 관리.
능환 (能奐)
남북국시대 때, 후백제의 왕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넷째 아들 금강을 살해한 관리.
「백제용신설화」는 백제와 후백제의 왕계를 물의 용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무왕」조와 「조룡대 설화」, 「견훤 설화」 등에서 용신이 등장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무왕의 탄생에서는 용신의 현현, 백제의 멸망에서는 용신의 최후, 그리고 견훤의 실패와 좌절에는 용신의 후예로서 부정되는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용신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유대감과 지속 의지 및 복원에 대한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된다.
백제용신설화 (百濟龍神說話)
「백제용신설화」는 백제와 후백제의 왕계를 물의 용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는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무왕」조와 「조룡대 설화」, 「견훤 설화」 등에서 용신이 등장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무왕의 탄생에서는 용신의 현현, 백제의 멸망에서는 용신의 최후, 그리고 견훤의 실패와 좌절에는 용신의 후예로서 부정되는 이야기가 그려지는데, 용신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적 유대감과 지속 의지 및 복원에 대한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해석된다.
전견훤묘(傳甄萱墓)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견훤왕릉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러 기록에는 은진현 남쪽 풍계촌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금곡리가 예전에 은진현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이곳을 견훤묘로 보고 있다.
전 견훤 묘 (傳 甄萱 墓)
전견훤묘(傳甄萱墓)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후백제의 왕 견훤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견훤왕릉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러 기록에는 은진현 남쪽 풍계촌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금곡리가 예전에 은진현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이곳을 견훤묘로 보고 있다.
수미강은 남북국시대 후백제 견훤의 아들이며, 924년 7월 조물성전투에 출전하였다. 수미강은 이 전투에서 비록 성을 빼앗지 못하고 퇴각하였지만, 조물성을 구원하기 위해 온 고려의 장군 애선을 전사시키는 공을 세웠다. 수미강의 실체는 자세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견훤의 둘째 아들인 양검보다 서열이 앞선 것으로 보아, 수미강은 견훤의 첫째 아들인 신검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수미강 (須彌康)
수미강은 남북국시대 후백제 견훤의 아들이며, 924년 7월 조물성전투에 출전하였다. 수미강은 이 전투에서 비록 성을 빼앗지 못하고 퇴각하였지만, 조물성을 구원하기 위해 온 고려의 장군 애선을 전사시키는 공을 세웠다. 수미강의 실체는 자세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견훤의 둘째 아들인 양검보다 서열이 앞선 것으로 보아, 수미강은 견훤의 첫째 아들인 신검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의 동생으로, 『삼국유사』 견훤조에 기록된 왕족·장수.
용개 (龍盖)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의 동생으로, 『삼국유사』 견훤조에 기록된 왕족·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