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경제_계획"
검색결과 총 19건
중화학공업은 제조업을 제조되는 생산물의 중량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경우, 금속·기계, 화학, 석유 등 중량이 큰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이다.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은 보통 제품의 용적에 대한 중량의 크기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해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고 특히 철강·조선·비철금속·기계·전자 및 화학공업은 6대 전략산업으로 분류되어 집중적으로 육성됐다. 우리나라는 산업 내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매우 높아 우리나라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중화학공업 (重化學工業)
중화학공업은 제조업을 제조되는 생산물의 중량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경우, 금속·기계, 화학, 석유 등 중량이 큰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이다.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은 보통 제품의 용적에 대한 중량의 크기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해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고 특히 철강·조선·비철금속·기계·전자 및 화학공업은 6대 전략산업으로 분류되어 집중적으로 육성됐다. 우리나라는 산업 내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매우 높아 우리나라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공업은 제조업을 생산물의 중량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할 경우, 주로 섬유·잡화·식품업 등 소비재를 생산하는 공업이다. 중화학공업과 대칭을 이루는 공업으로 현재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르면 식료품, 음료, 담배, 섬유제품, 의복 및 모피, 가죽 및 신발, 목재 및 나무제품, 인쇄 및 기록매체, 고무 및 플라스틱, 가구, 기타제조업이 경공업에 포함된다. 대체로 중량이 가벼운 제품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경공업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면서 급격히 발전했으나,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함께 산업이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개편됨에 따라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경공업 (輕工業)
경공업은 제조업을 생산물의 중량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할 경우, 주로 섬유·잡화·식품업 등 소비재를 생산하는 공업이다. 중화학공업과 대칭을 이루는 공업으로 현재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르면 식료품, 음료, 담배, 섬유제품, 의복 및 모피, 가죽 및 신발, 목재 및 나무제품, 인쇄 및 기록매체, 고무 및 플라스틱, 가구, 기타제조업이 경공업에 포함된다. 대체로 중량이 가벼운 제품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경공업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면서 급격히 발전했으나,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함께 산업이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개편됨에 따라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해방 이후 재무부장관, 대통령수석정무비서관,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행정가, 경제관료.
김학렬 (金鶴烈)
해방 이후 재무부장관, 대통령수석정무비서관,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행정가, 경제관료.
아시아 서부에 있는 공화국.
튀르키예 (Türkiye)
아시아 서부에 있는 공화국.
업무의 효율성 제고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국가가 운영하던 기업을 민간부문에서 경영하게 하는 경제정책. 공기업선진화.
공기업 민영화 (公企業 民營化)
업무의 효율성 제고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국가가 운영하던 기업을 민간부문에서 경영하게 하는 경제정책. 공기업선진화.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구축에 목적을 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5개년간의 경제계획.
인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 (人民經濟發展 五個年 計劃)
사회주의 공업화의 기초구축에 목적을 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5개년간의 경제계획.
직접자본이 아닌 간접적으로 여러 가지 생산 활동에 기여하는 자본. 사회적 자본·인프라·공공자본·간접자본.
사회간접자본 (社會間接資本)
직접자본이 아닌 간접적으로 여러 가지 생산 활동에 기여하는 자본. 사회적 자본·인프라·공공자본·간접자본.
한미경제협력위원회는 1963년 7월 18일 한국의 제반 경제문제 검토 및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 합의로 설치된 위원회이다. 본래는 미국이 제공하던 원조 자금 및 물자를 어떻게 사용하고 배분할지에 대해 협의하는 기관이지만, 한국경제 시스템의 주요 부분에 미국 측이 관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5·16 이후 활동이 중지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폐지되고 한미의 경제정책 협의를 위해 설치되었는데, 경제적 자주성이 침해될 우려가 제기되었다. 한미경제협력위원회의 활동과 영향력은 한국경제의 성장 추세와 미국 원조의 감소로 줄어들었다.
한미경제협력위원회 (韓美經濟協力委員會)
한미경제협력위원회는 1963년 7월 18일 한국의 제반 경제문제 검토 및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 합의로 설치된 위원회이다. 본래는 미국이 제공하던 원조 자금 및 물자를 어떻게 사용하고 배분할지에 대해 협의하는 기관이지만, 한국경제 시스템의 주요 부분에 미국 측이 관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5·16 이후 활동이 중지된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폐지되고 한미의 경제정책 협의를 위해 설치되었는데, 경제적 자주성이 침해될 우려가 제기되었다. 한미경제협력위원회의 활동과 영향력은 한국경제의 성장 추세와 미국 원조의 감소로 줄어들었다.
라진, 선봉지역을 중심으로 획정된 경제특구를 규정한 법.
라선경제무역지대법 (羅先經濟貿易地帶法)
라진, 선봉지역을 중심으로 획정된 경제특구를 규정한 법.
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조사, 심의, 결정하기 위해 1958년 4월 대통령령에 의해 발족된 경제계획기구.
산업개발위원회 (産業開發委員會)
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조사, 심의, 결정하기 위해 1958년 4월 대통령령에 의해 발족된 경제계획기구.
인민경제계획의 작성, 비준과 시달, 실행 등에서 제도와 질서를 확립하여 인민경제를 계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법.
인민경제계획법 (人民經濟計劃法)
인민경제계획의 작성, 비준과 시달, 실행 등에서 제도와 질서를 확립하여 인민경제를 계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법.
해방 이후 건설부장관, 상공부장관, 동력자원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장예준 (張禮準)
해방 이후 건설부장관, 상공부장관, 동력자원부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
특정연구개발사업은 전략 산업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추진된 최초의 범국가적 연구 개발 사업이다. 정부가 주도하여 산업계, 학계, 정부 출연 연구소의 연구 역량을 결집하고, 이를 통해 국가 주요 산업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정연구개발사업 (特定硏究開發事業)
특정연구개발사업은 전략 산업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추진된 최초의 범국가적 연구 개발 사업이다. 정부가 주도하여 산업계, 학계, 정부 출연 연구소의 연구 역량을 결집하고, 이를 통해 국가 주요 산업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민저축조합은 내자 동원 위주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저축을 늘리기 위해 1962년부터 지역별과 직장별로, 또 학교마다 조직된 저축조합이다. 1960년대 초 경제개발을 위해 투자율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지역별, 직장별, 학교마다 국민저축조합을 만들어 저축을 독려하였다. 저축 여력이 없고 인플레이션으로 저축 유인도 없어서 그 효과는 크지 않았고, 1965년 금리현실화(대폭 인상)에 따라 은행 예금이 급증하자 국민저축조합은 그 시효를 상실하였다.
국민저축조합 (國民貯蓄組合)
국민저축조합은 내자 동원 위주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저축을 늘리기 위해 1962년부터 지역별과 직장별로, 또 학교마다 조직된 저축조합이다. 1960년대 초 경제개발을 위해 투자율을 높여야 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지역별, 직장별, 학교마다 국민저축조합을 만들어 저축을 독려하였다. 저축 여력이 없고 인플레이션으로 저축 유인도 없어서 그 효과는 크지 않았고, 1965년 금리현실화(대폭 인상)에 따라 은행 예금이 급증하자 국민저축조합은 그 시효를 상실하였다.
기능공 양성 정책은 공업화 과정에서 늘어나는 기능공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이다. 공업고등학교와 직업훈련소를 통해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980년대에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정책은 거의 폐기되었다.
기능공 양성 정책 (技能工 養成 政策)
기능공 양성 정책은 공업화 과정에서 늘어나는 기능공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이다. 공업고등학교와 직업훈련소를 통해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980년대에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정책은 거의 폐기되었다.
네이산보고서는 1954년 2월 유엔한국재건단과 용역 계약을 체결한 네이산협회가 한국 경제 재건을 위해 작성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1953년을 1차 연도로 하고 1957년을 목표 연도로 한 5개년 한국경제재건계획인데, 1958년부터 한국 경제가 외국의 원조 없이도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립 경제를 목표하였다. 재건 계획 기간 동안에 필요한 원조액은 12억 4천만 달러였고, 총 투자액은 19억 27백만 달러였다. 이를 통해 1958년에 1인당 소비 지출은 73.50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계획했으나 거의 실행되지는 못했다.
네이산보고서 (Nathan Report|Nathan報告書)
네이산보고서는 1954년 2월 유엔한국재건단과 용역 계약을 체결한 네이산협회가 한국 경제 재건을 위해 작성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1953년을 1차 연도로 하고 1957년을 목표 연도로 한 5개년 한국경제재건계획인데, 1958년부터 한국 경제가 외국의 원조 없이도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립 경제를 목표하였다. 재건 계획 기간 동안에 필요한 원조액은 12억 4천만 달러였고, 총 투자액은 19억 27백만 달러였다. 이를 통해 1958년에 1인당 소비 지출은 73.50달러를 달성할 것으로 계획했으나 거의 실행되지는 못했다.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은 1949년에 정부 기획처가 산업 부흥과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수립한 경제 계획이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가 계획 기간으로, 국내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연료(燃料)와 동력(動力), 공업(工業)의 14개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증산(增産)을 계획하였다. 한국전쟁(韓國戰爭) 등의 원인으로 계획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 계획은 이후 전개되는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經濟開發計劃)의 시작점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산업부흥 5개년 계획 (産業復興 五個年 計劃)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은 1949년에 정부 기획처가 산업 부흥과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수립한 경제 계획이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가 계획 기간으로, 국내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연료(燃料)와 동력(動力), 공업(工業)의 14개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증산(增産)을 계획하였다. 한국전쟁(韓國戰爭) 등의 원인으로 계획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 계획은 이후 전개되는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經濟開發計劃)의 시작점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경제협조처는 1948년 12월 한미경제협정 체결을 통해 미국의 한국 원조에 대한 계획과 조정을 담당한 대외 원조 기구이다. 원래 1948년도 외국 원조법에 의거하여 유럽경제부흥을 위해 설치한 미국의 대외원조기구였는데, 1948년 12월 10일에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원조협정’을 체결한 후, 주한 경제협조처 사절단을 개설하고 1949년 1월 1일부터 원조사무를 시작하였다. 경제협조처 원조는 한국 경제 개발의 촉진을 위한 기술 원조와 원료 물자, 비료 및 부흥 계획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경제협조처 (經濟協助處)
경제협조처는 1948년 12월 한미경제협정 체결을 통해 미국의 한국 원조에 대한 계획과 조정을 담당한 대외 원조 기구이다. 원래 1948년도 외국 원조법에 의거하여 유럽경제부흥을 위해 설치한 미국의 대외원조기구였는데, 1948년 12월 10일에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원조협정’을 체결한 후, 주한 경제협조처 사절단을 개설하고 1949년 1월 1일부터 원조사무를 시작하였다. 경제협조처 원조는 한국 경제 개발의 촉진을 위한 기술 원조와 원료 물자, 비료 및 부흥 계획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국토건설청은 1961년 7월 국토 건설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경제기획원장 소속으로 설치한 중앙행정기관이다. 1961년 7월 22일 건설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건설부 국토건설국 소관 사무를 이어 받으면서 조직되었는데, 초대 국토건설청장은 조성근이 맡았으며, 안경모가 차장직을 역임하였다. 국토건설청은 경제기획원장의 명을 받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범위 내에서 국토 및 자연자원의 보전, 이용, 개발 및 개조의 계획, 실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국토건설청 (國土建設廳)
국토건설청은 1961년 7월 국토 건설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경제기획원장 소속으로 설치한 중앙행정기관이다. 1961년 7월 22일 건설부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건설부 국토건설국 소관 사무를 이어 받으면서 조직되었는데, 초대 국토건설청장은 조성근이 맡았으며, 안경모가 차장직을 역임하였다. 국토건설청은 경제기획원장의 명을 받아 장기경제개발계획의 범위 내에서 국토 및 자연자원의 보전, 이용, 개발 및 개조의 계획, 실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