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김안로"
검색결과 총 15건
조선 전기에, 예문관검열, 석성현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민세량 (閔世良)
조선 전기에, 예문관검열, 석성현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한성부좌윤, 경연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강현 (姜顯)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한성부좌윤, 경연특진관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전기 제11대 중종의 첫째 아들.
복성군 (福城君)
조선전기 제11대 중종의 첫째 아들.
조선 전기에, 지평, 정언,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심언광 (沈彦光)
조선 전기에, 지평, 정언,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양연 (梁淵)
조선 전기에,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전기 문신 김안로가 35가지의 이야기를 수록한 야담집.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
조선전기 문신 김안로가 35가지의 이야기를 수록한 야담집.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명규 (李名珪)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형조참판, 경주부윤,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이몽필 (李夢弼)
조선 전기에, 형조참판, 경주부윤,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부제학, 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유세린 (柳世麟)
조선 전기에, 부제학, 승지,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교수,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승효 (李承孝)
조선 전기에, 교수,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언적은 조선전기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성종 22)에 태어나 1553년(명종 8)에 사망했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7년간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복직 후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추국하는 역할이 주어지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유배됐고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준 인물이다.
이언적 (李彦迪)
이언적은 조선전기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성종 22)에 태어나 1553년(명종 8)에 사망했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7년간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복직 후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추국하는 역할이 주어지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유배됐고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준 인물이다.
조선 전기에, 우참찬, 동지경연사,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임권 (任權)
조선 전기에, 우참찬, 동지경연사,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대사헌, 대사간,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해 (李瀣)
조선 전기에, 대사헌, 대사간,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1527년(중종 22) 3월 쥐를 잡아 동궁(東宮: 뒤의 인종)을 저주한 사건.
작서의 변 (灼鼠의 變)
1527년(중종 22) 3월 쥐를 잡아 동궁(東宮: 뒤의 인종)을 저주한 사건.
조선 전기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의 아들로 사면된 이후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이다. 기묘사화 이후 부친의 망명으로 추국령이 내려지자, 동생 김덕순과 함께 행적을 감추고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 신원(伸寃)된 뒤 집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등 많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552년(명종 7) 향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부친 김식이 도학에 있어서 조광조와 쌍벽을 이룰 만큼 명성이 높았는데, 그 역시 부친으로부터 도학에 대한 수준 높은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덕수 (金德秀)
조선 전기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의 아들로 사면된 이후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이다. 기묘사화 이후 부친의 망명으로 추국령이 내려지자, 동생 김덕순과 함께 행적을 감추고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 신원(伸寃)된 뒤 집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등 많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552년(명종 7) 향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부친 김식이 도학에 있어서 조광조와 쌍벽을 이룰 만큼 명성이 높았는데, 그 역시 부친으로부터 도학에 대한 수준 높은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