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낙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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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철을 이용해 도구로 사용하게 된 시기부터 역사시대 이전까지의 시기.
철기시대 (鐵器時代)
인류가 철을 이용해 도구로 사용하게 된 시기부터 역사시대 이전까지의 시기.
태조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3~146년으로 국조왕 또는 태조대왕이라고도 한다. 모본왕 살해 후 여러 관리들이 그의 아버지 재사를 왕으로 추대했는데 재사가 나이가 많다 하여 사양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하는 동안 후한의 압력을 차단하고 서방진출을 시도하여 고구려의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주변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관료로 흡수하여 전제왕권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갖추었다. 동생 수성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고 왕위까지 노리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165년 1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태조왕 (太祖王)
태조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3~146년으로 국조왕 또는 태조대왕이라고도 한다. 모본왕 살해 후 여러 관리들이 그의 아버지 재사를 왕으로 추대했는데 재사가 나이가 많다 하여 사양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하는 동안 후한의 압력을 차단하고 서방진출을 시도하여 고구려의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주변 소국의 지배세력들을 관료로 흡수하여 전제왕권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갖추었다. 동생 수성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고 왕위까지 노리자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165년 1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순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935년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다투던 경명왕 때부터 경애왕 대에 이르러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 경순왕은 난폭한 견훤의 보호국보다는 왕건에게 투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935년 국가를 고려에 넘길 것을 결의하고 국서를 보냈다. 왕건은 신라를 경주로 고쳐 그의 식읍으로 주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78년에 승하했다.
경순왕 (敬順王)
경순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935년이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쳤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다투던 경명왕 때부터 경애왕 대에 이르러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했다. 경순왕은 난폭한 견훤의 보호국보다는 왕건에게 투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935년 국가를 고려에 넘길 것을 결의하고 국서를 보냈다. 왕건은 신라를 경주로 고쳐 그의 식읍으로 주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978년에 승하했다.
벽돌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양식이다.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덧널무덤[木槨墓] 축조로 산림자원이 감소하여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낙랑은 중국 한나라의 양식이고 백제는 남조 양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이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고령 지역 고분군에 이어졌다.
벽돌무덤 (甓돌무덤)
벽돌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양식이다.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덧널무덤[木槨墓] 축조로 산림자원이 감소하여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낙랑은 중국 한나라의 양식이고 백제는 남조 양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이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고령 지역 고분군에 이어졌다.
진덕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7~654년이며,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다. 즉위하면서 비담의 난을 진압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한편,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신라 문제에 소극적이던 당나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고 긴밀한 외교관계를 구축했다. 의관을 중국식으로 바꿨고 연호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한화정책을 폈으며, 집사부 설치, 행정관부의 체계화로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계를 완성했다.
진덕여왕 (眞德女王)
진덕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7~654년이며,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다. 즉위하면서 비담의 난을 진압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한편,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신라 문제에 소극적이던 당나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고 긴밀한 외교관계를 구축했다. 의관을 중국식으로 바꿨고 연호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한화정책을 폈으며, 집사부 설치, 행정관부의 체계화로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계를 완성했다.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이다. 태토의 정선화, 타날성형,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와질토기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와질토기 기원은 전국시대 회도 혹은 낙랑토기가 남하하면서 전래되었다는 외부기원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와질토기 (瓦質土器)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이다. 태토의 정선화, 타날성형,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와질토기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와질토기 기원은 전국시대 회도 혹은 낙랑토기가 남하하면서 전래되었다는 외부기원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1950년 2월 초 김수임이 북한의 주요 인사를 월북시켰다는 점과 기밀문서를 북한에 유출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6월 28일 사형당한 사건.
김수임 간첩 사건 (金壽任 間諜 事件)
1950년 2월 초 김수임이 북한의 주요 인사를 월북시켰다는 점과 기밀문서를 북한에 유출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북한의 간첩으로 몰려 6월 28일 사형당한 사건.
원삼국시대는 우리나라 고고학 편년상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의 시기이다. 서기전 1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이른다.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 김해토기의 출현, 벼농사의 발전, 고인돌의 소멸, 돌덧널무덤의 발달 등 문화적 특징이 나타났다. 고고학계에서는 철기시대 Ⅱ기, 역사학계에서는 삼한시대·부족국가시대·성읍국가시대·삼국시대 초기·삼국시대 전기 등으로 명명하였다. 이러한 용어상의 불편과 불합리를 줄이고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에서 모두 쓸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고고학계에서 제안한 용어이다.
원삼국시대 (原三國時代)
원삼국시대는 우리나라 고고학 편년상 초기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의 시기이다. 서기전 1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이른다.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 김해토기의 출현, 벼농사의 발전, 고인돌의 소멸, 돌덧널무덤의 발달 등 문화적 특징이 나타났다. 고고학계에서는 철기시대 Ⅱ기, 역사학계에서는 삼한시대·부족국가시대·성읍국가시대·삼국시대 초기·삼국시대 전기 등으로 명명하였다. 이러한 용어상의 불편과 불합리를 줄이고 고고학계와 문헌사학계에서 모두 쓸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고고학계에서 제안한 용어이다.
봉니는 고대 낙랑군에서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찍은 점토덩어리이다. 원래 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 기원하였는데 중국 전국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을 변조하기 쉬운 죽간과 목간을 밀봉하거나 중요한 물품의 보관과 내용물 도난을 막기 위해 이용되었다. 인장을 문서에 날인할 수 있는 종이가 개발되면서 사용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시 남안에서 200여 점이 발견되어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활용되었다. 해방 이후 재발굴 결과,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날조한 위조품으로 판명되었다.
봉니 (封泥)
봉니는 고대 낙랑군에서 공문서를 봉함하기 위하여 묶은 노끈의 이음매에 붙이는 인장을 눌러 찍은 점토덩어리이다. 원래 고대 오리엔트 지역에서 기원하였는데 중국 전국시대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을 변조하기 쉬운 죽간과 목간을 밀봉하거나 중요한 물품의 보관과 내용물 도난을 막기 위해 이용되었다. 인장을 문서에 날인할 수 있는 종이가 개발되면서 사용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평양시 남안에서 200여 점이 발견되어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활용되었다. 해방 이후 재발굴 결과,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기 위하여 날조한 위조품으로 판명되었다.
맥궁(貊弓)은 3세기 무렵 소수맥의 거주지에서 생산되던 명궁의 하나이다. 소수맥은 소수에 거주하였는데, 지금의 압록강 하류 일대로 파악된다. 3세기 초반 위나라 조조의 세력이 부상하자 예와 맥이 좋은 활을 공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때 소수맥의 맥궁이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맥궁 (貊弓)
맥궁(貊弓)은 3세기 무렵 소수맥의 거주지에서 생산되던 명궁의 하나이다. 소수맥은 소수에 거주하였는데, 지금의 압록강 하류 일대로 파악된다. 3세기 초반 위나라 조조의 세력이 부상하자 예와 맥이 좋은 활을 공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때 소수맥의 맥궁이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낙랑국의 왕 최리의 딸인 공주.
낙랑공주 (樂浪公主)
삼국시대 낙랑국의 왕 최리의 딸인 공주.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는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낙랑시대의 금제 띠고리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틀 위에 금판을 놓고 두드려서 큰 용 1마리와 작은 용 6마리를 표현하였다. 그다음 금실과 크고 작은 금알갱이, 비취옥 등으로 장식하여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는 말발굽 모양으로, 앞쪽은 둥글고 뒤쪽은 직각으로 각이 진 형태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장식 기법이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또 누금세공의 수법이 매우 뛰어나며 용 7마리의 배치가 율동감이 있다. 이 띠고리는 현재 한반도에서 출토된 금제 공예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平壤 石巖里 金製 띠고리)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는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낙랑시대의 금제 띠고리이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틀 위에 금판을 놓고 두드려서 큰 용 1마리와 작은 용 6마리를 표현하였다. 그다음 금실과 크고 작은 금알갱이, 비취옥 등으로 장식하여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는 말발굽 모양으로, 앞쪽은 둥글고 뒤쪽은 직각으로 각이 진 형태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장식 기법이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또 누금세공의 수법이 매우 뛰어나며 용 7마리의 배치가 율동감이 있다. 이 띠고리는 현재 한반도에서 출토된 금제 공예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북한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낙랑군의 토축 성곽. 토성.
낙랑토성 (樂浪土城)
북한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낙랑군의 토축 성곽. 토성.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는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예맥족 군장 부조예군의 덧널무덤이다. 발견 당시 봉분과 무덤 내부가 거의 파괴되어 있었으나,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단장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 세형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는 부조예군을 새긴 은제 도장이 출토되어 피장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덧널무덤이라는 점에서 서기전 1세기 대 낙랑군의 치하에 있던 고조선 후기 토착 세력의 모습을 보여 주는 무덤으로 주목된다.
부조예군묘 (夫租薉君墓)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는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예맥족 군장 부조예군의 덧널무덤이다. 발견 당시 봉분과 무덤 내부가 거의 파괴되어 있었으나,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단장 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굴 결과 세형동검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는 부조예군을 새긴 은제 도장이 출토되어 피장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덧널무덤이라는 점에서 서기전 1세기 대 낙랑군의 치하에 있던 고조선 후기 토착 세력의 모습을 보여 주는 무덤으로 주목된다.
이민자는 해방 이후 「미망인」, 「마인」, 「김약국의 딸들」 등에 출연한 배우이다. 1944년 유치진의 극단 현대극장에 연구생으로 입단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후 낙랑극회(신협의 전신)를 따라 부산에서 만주까지 유랑생활을 했다. 이강천 감독의 「생명」(1958)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유두연 감독의 「유혹의 강」(1958) 등 많은 영화에서 ‘미망인’을 연기했다. 성적 매력과 과감한 연기를 바탕으로 당대의 톱 배우들과 인기를 겨루었다. 주로 전쟁 과부 역할을 맡아 40대 중년층 관객팬이 많았고, ‘한국의 에바 가드너’라고 불렸다.
이민자 (李民子)
이민자는 해방 이후 「미망인」, 「마인」, 「김약국의 딸들」 등에 출연한 배우이다. 1944년 유치진의 극단 현대극장에 연구생으로 입단하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후 낙랑극회(신협의 전신)를 따라 부산에서 만주까지 유랑생활을 했다. 이강천 감독의 「생명」(1958)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유두연 감독의 「유혹의 강」(1958) 등 많은 영화에서 ‘미망인’을 연기했다. 성적 매력과 과감한 연기를 바탕으로 당대의 톱 배우들과 인기를 겨루었다. 주로 전쟁 과부 역할을 맡아 40대 중년층 관객팬이 많았고, ‘한국의 에바 가드너’라고 불렸다.
한강유역에 있었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백제국 (伯濟國)
한강유역에 있었던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평양정백동고분군(平壤貞柏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나무널무덤 · 덧널무덤 · 귀틀무덤 · 벽돌무덤 · 독널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산재하는 낙랑 시기의 무덤군이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발굴되면서 일찍이 그 중요성이 인지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수천 개의 낙랑고분이 발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평양정백동고분군은 낙랑토성과 함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평양 정백동 고분군 (平壤 貞柏洞 古墳群)
평양정백동고분군(平壤貞柏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나무널무덤 · 덧널무덤 · 귀틀무덤 · 벽돌무덤 · 독널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산재하는 낙랑 시기의 무덤군이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발굴되면서 일찍이 그 중요성이 인지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수천 개의 낙랑고분이 발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평양정백동고분군은 낙랑토성과 함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초기국가시대 한나라의 통치에 저항한 낙랑지역의 토착 호족.
왕조 (王調)
초기국가시대 한나라의 통치에 저항한 낙랑지역의 토착 호족.
고려전기 제1대 태조의 제3왕비.
신명순성왕태후 (神明順成王太后)
고려전기 제1대 태조의 제3왕비.
화분모양 토기는 아가리가 곡선이나 직각으로 꺾여 벌어지고, 몸통은 약간의 직선을 이루면서 바닥쪽으로 좁아지며, 바닥이 납작하거나 굽이 붙은 화분 모양의 토기이다. 몸통이 가장 넓고 아가리가 약간 오므라드는 바리모양 토기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화분모양 토기는 낙랑군 설치를 전후하여 낙랑 지역에 발굴된 독널무덤, 움무덤, 덧널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에서 출토되었다.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므로 음식을 삶고 끓이는 자비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바탕흙에 활석이 혼입된 토기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껴묻거리로 사용되었다.
화분모양 토기 (花盆形 土器)
화분모양 토기는 아가리가 곡선이나 직각으로 꺾여 벌어지고, 몸통은 약간의 직선을 이루면서 바닥쪽으로 좁아지며, 바닥이 납작하거나 굽이 붙은 화분 모양의 토기이다. 몸통이 가장 넓고 아가리가 약간 오므라드는 바리모양 토기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화분모양 토기는 낙랑군 설치를 전후하여 낙랑 지역에 발굴된 독널무덤, 움무덤, 덧널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에서 출토되었다.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므로 음식을 삶고 끓이는 자비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바탕흙에 활석이 혼입된 토기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껴묻거리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