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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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김동삼 (金東三)
김동삼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성숙 (金星淑)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승려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이다.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주요 독립운동 활동으로 3·1 운동 주도, 조선의열단 가담, 조선의용대 조직 및 정치부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 등이 있다. 광복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으며, 진보당사건(1955년)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9년 서거하였으며,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곽경렬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가을부터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 일대에서 6인의 동지와 함께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는데, 동지들이 체포되면서 은신해 있다가 뒤늦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곽경렬 (郭京烈)
곽경렬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가을부터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 일대에서 6인의 동지와 함께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는데, 동지들이 체포되면서 은신해 있다가 뒤늦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남형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차장, 교통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대한국민회의 개최를 위한 주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남형우 (南亨祐)
남형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차장, 교통총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열린 대한국민회의 개최를 위한 주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박원국은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조달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이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10여 명의 조직원들과 함께 평안남도 강동군과 평원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원국 (朴元國)
박원국은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조달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이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10여 명의 조직원들과 함께 평안남도 강동군과 평원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의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
무정부주의운동 (無政府主義運動)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의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
노백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무관으로서 서북학회, 대한흥학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 후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노백린 (盧伯麟)
노백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무관으로서 서북학회, 대한흥학회,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고,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 후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광복군사령부는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 민국독립단 그리고 국내의 의용단을 통합하여 설치하려 한 서간도 지방사령부이다. 대한청년단연합회, 민국독립단 그리고 국내의 의용단을 통합하여 설치하려 하였으며, 서간도에서 조직된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되었다.
광복군사령부 (光復軍司令部)
광복군사령부는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 민국독립단 그리고 국내의 의용단을 통합하여 설치하려 한 서간도 지방사령부이다. 대한청년단연합회, 민국독립단 그리고 국내의 의용단을 통합하여 설치하려 하였으며, 서간도에서 조직된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되었다.
방순희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여성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여 부주석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에서 근무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연락원으로서 중국 각지에서 선무 공작을 벌이고 1946년에 귀국하였다.
방순희 (方順熙)
방순희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여성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여 부주석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에서 근무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연락원으로서 중국 각지에서 선무 공작을 벌이고 1946년에 귀국하였다.
김철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에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립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핵심 역할을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을 두루 거치며 활동하였고, 한국독립당 창당에도 관여하였다.
김철 (金澈)
김철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에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립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핵심 역할을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을 두루 거치며 활동하였고, 한국독립당 창당에도 관여하였다.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한 (金翰)
김한은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본 유학을 경험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법부 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과 의혈 투쟁에 투신하여 무산자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홍서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으로 시작해 1930년대 중반까지 여러 차례 의원직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김홍서 (金弘敍)
김홍서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으로 시작해 1930년대 중반까지 여러 차례 의원직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김홍일 (金弘壹)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1920년대 초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독립당 (獨立黨)
1920년대 초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북경군사통일회는 1921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숙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운동단체이다.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조직하였으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군사상 총기관을 조직해 군사단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서 창조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북경군사통일회 (北京軍事統一會)
북경군사통일회는 1921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 신숙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운동단체이다.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조직하였으며,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군사상 총기관을 조직해 군사단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서 창조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나석주 (羅錫疇)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신익희 (申翼熙)
신익희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에 태어나 1956년에 사망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3·1운동 후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다. 귀국 후 임시정부 계통과 노선을 달리했고,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유세활동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안창남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워 중국 국민혁명군 및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한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에서 비행사 면허를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하고, 1922년 고국 방문 비행을 성황리에 마쳤으며,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촉, 중국군에 참여하여 항공 독립운동 방략을 추구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안창남 (安昌男)
안창남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비행술을 배워 중국 국민혁명군 및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한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에서 비행사 면허를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하고, 1922년 고국 방문 비행을 성황리에 마쳤으며,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촉, 중국군에 참여하여 항공 독립운동 방략을 추구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소독단(消毒團)은 1919년 밀정 소탕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의 외곽에 조직된 비밀단체이다. 중국 상하이 한인 사회에 들어오는 밀정의 감시와 색출, 제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경무국장 김구(金九)의 직계 조직으로 단장 손두환(孫斗煥)과 20여 명의 청년으로 구성되었다.
소독단 (消毒團)
소독단(消毒團)은 1919년 밀정 소탕을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의 외곽에 조직된 비밀단체이다. 중국 상하이 한인 사회에 들어오는 밀정의 감시와 색출, 제거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경무국장 김구(金九)의 직계 조직으로 단장 손두환(孫斗煥)과 20여 명의 청년으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