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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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 자강 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지식인들은 교육, 계몽, 언론 활동 등을 통해 우리나라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치사회단체, 학회,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애국계몽운동 (愛國啓蒙運動)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 자강 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지식인들은 교육, 계몽, 언론 활동 등을 통해 우리나라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치사회단체, 학회,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홍범도는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68년(고종 5)에 태어나 1943년에 사망했다. 1907년 의병을 일으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고 1910년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여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대한독립군을 창설하였다. 1920년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고,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되어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사망하였다. 2021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홍범도 (洪範圖)
홍범도는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68년(고종 5)에 태어나 1943년에 사망했다. 1907년 의병을 일으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고 1910년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여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대한독립군을 창설하였다. 1920년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고,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되어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사망하였다. 2021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김홍일 (金弘壹)
김홍일은 일제강점기 1·8 일왕저격, 4·29 상해의거 당시의 독립운동가이다.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했다. 신천경신학교 교사 재직 중 항일단체 가담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0년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다. 김구의 요청으로 1932년 이봉창의 1·8 일왕저격 및 윤봉길의 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국회의원, 정당 당수 등 정치가로 활동했다.
1919년 5월 3일 만주에 설립되었던 독립군 양성학교.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1919년 5월 3일 만주에 설립되었던 독립군 양성학교.
경신참변은 1920년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활발해진 만주지역 독립군의 국내 위협으로 인한 일제의 재만 독립군 초토화 작전 실패가 발단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마을을 포위 습격해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3,469명으로, 3, 4개월 동안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경신참변 (庚申慘變)
경신참변은 1920년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활발해진 만주지역 독립군의 국내 위협으로 인한 일제의 재만 독립군 초토화 작전 실패가 발단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마을을 포위 습격해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3,469명으로, 3, 4개월 동안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
조선의용군 (朝鮮義勇軍)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은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이다. 호남지역은 반일의식이 강하여 의병운동이 특히 활발한 곳이었다. 1909년 통계를 보면 호남지역의 전투의병 수가 전체의 과반을 넘었다. 일제는 호남지역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소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진행했다. 그 결과 의병 1만 7,779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 나왔다. 이 작전 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남한 대토벌 작전 (南韓 大討伐 作戰)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은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이다. 호남지역은 반일의식이 강하여 의병운동이 특히 활발한 곳이었다. 1909년 통계를 보면 호남지역의 전투의병 수가 전체의 과반을 넘었다. 일제는 호남지역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소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진행했다. 그 결과 의병 1만 7,779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 나왔다. 이 작전 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군정부이다. 서간도의 무장 항일 운동 단체가 결성한 군정부(軍政府)로 남만주 일대 독립 운동 총본영이었다. 신흥중학교를 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 및 민족반역자의 색출·처단, 친일 기관들을 소탕하였다. 한족 회원의 헌금으로 유지되었는데 국내에 재정 후원을 위한 조선독립 후원 의용단과 같은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다. 1922년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되었다.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서로군정서는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군정부이다. 서간도의 무장 항일 운동 단체가 결성한 군정부(軍政府)로 남만주 일대 독립 운동 총본영이었다. 신흥중학교를 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 및 민족반역자의 색출·처단, 친일 기관들을 소탕하였다. 한족 회원의 헌금으로 유지되었는데 국내에 재정 후원을 위한 조선독립 후원 의용단과 같은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다. 1922년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되었다.
1913년경 평양에서 조직되었던 여성독립운동단체.
송죽회 (松竹會)
1913년경 평양에서 조직되었던 여성독립운동단체.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군의 분대장으로, 봉오동전투에서 활약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화일 (李化日)
일제강점기 때, 대한독립군의 분대장으로, 봉오동전투에서 활약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망명 정부.
대한광복군정부 (大韓光復軍政府)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망명 정부.
1930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정당.
한국독립당 (韓國獨立黨)
1930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정당.
낙양군관학교는 1933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낙양에 설립되었던 국민정부 군관학교이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투탄의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과 김구는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인훈련반이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중국 여러 지역에서 모집한 한국인 99명이 입학하여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를 편성하였다. 중국식 훈련이 아니라 한국인 교관이 학생의 정치·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일본 영사의 해산 요구로 1935년 1기생 65명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다. 졸업생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독립군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낙양군관학교 (洛陽軍官學校)
낙양군관학교는 1933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낙양에 설립되었던 국민정부 군관학교이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투탄의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과 김구는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인훈련반이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중국 여러 지역에서 모집한 한국인 99명이 입학하여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를 편성하였다. 중국식 훈련이 아니라 한국인 교관이 학생의 정치·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일본 영사의 해산 요구로 1935년 1기생 65명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다. 졸업생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선 독립군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군무도독부 (軍務都督府)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박용만(朴容萬)의 주도하에 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 커니(Kearney)시에 세워진 학교이다. 다음 해 헤이스팅스(Hastings)시로 이주하여 1914년까지 6년에 걸쳐 존속하며 9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최신 군사 훈련을 받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한인소년병학교 (韓人少年兵學校)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박용만(朴容萬)의 주도하에 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 커니(Kearney)시에 세워진 학교이다. 다음 해 헤이스팅스(Hastings)시로 이주하여 1914년까지 6년에 걸쳐 존속하며 9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최신 군사 훈련을 받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14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간도국민회 (間島國民會)
1914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행정 조직.
군무부 (軍務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행정 조직.
경박호전투는 1933년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이 연합해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만주의 경박호에서 섬멸한 전투이다. 일제가 만주국을 수립하자 북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려워진 한국독립군은 일제에 맞서기 위해 중국 항일의용군인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였다. 연합부대는 이동하는 길에 우연히 일·만군의 정보를 듣고 경박호에서 매복하였다가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는 일·만군 후속부대 1개 대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많은 물품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경박호전투는 연합부대 최초의 승리로 항일무장 투쟁을 더욱 고양시켰다.
경박호전투 (鏡泊湖戰鬪)
경박호전투는 1933년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이 연합해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만주의 경박호에서 섬멸한 전투이다. 일제가 만주국을 수립하자 북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려워진 한국독립군은 일제에 맞서기 위해 중국 항일의용군인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였다. 연합부대는 이동하는 길에 우연히 일·만군의 정보를 듣고 경박호에서 매복하였다가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는 일·만군 후속부대 1개 대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많은 물품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경박호전투는 연합부대 최초의 승리로 항일무장 투쟁을 더욱 고양시켰다.
일제강점기 때, 대동단, 부한청년단 등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공명단을 조직해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신덕영 (申德永)
일제강점기 때, 대동단, 부한청년단 등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공명단을 조직해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유림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무위원, 독립노농당 초대 당수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어문학자, 아나키스트이다. 1898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경술국치 당시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의 4자 혈서를 써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21년 이후 북경과 상해에서 신채호,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22년 아나키스트로 전향하였다. 김두봉, 신채호 등과 함께 『한글말본』, 『깊더조선말본』 등을 저술하였다. 해방 후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농당을 결성해 당수에 취임하고 『노농신문』을 발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림 (柳林)
유림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무위원, 독립노농당 초대 당수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어문학자, 아나키스트이다. 1898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경술국치 당시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의 4자 혈서를 써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21년 이후 북경과 상해에서 신채호,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22년 아나키스트로 전향하였다. 김두봉, 신채호 등과 함께 『한글말본』, 『깊더조선말본』 등을 저술하였다. 해방 후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농당을 결성해 당수에 취임하고 『노농신문』을 발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