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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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은 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4년에 태어나 1960년에 사망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간부로 일했으며 광주학생운동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했다.
조병옥 (趙炳玉)
조병옥은 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94년에 태어나 1960년에 사망했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신간회 간부로 일했으며 광주학생운동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했다.
1907년 7월 24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
보안법 (保安法)
1907년 7월 24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
수양동우회는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이다.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합동하여 결성되었는데 국외에 있는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 및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하는 합법 단체로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을 중견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1937년 기독교계 회원이 전개한 민족운동에 연루되어 지방동우회의 회원이 기소되었다. 1941년 상고심에서는 사건 관련자가 대부분 친일파로 전락하였기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수양동우회 (修養同友會)
수양동우회는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이다.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합동하여 결성되었는데 국외에 있는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 및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하는 합법 단체로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을 중견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1937년 기독교계 회원이 전개한 민족운동에 연루되어 지방동우회의 회원이 기소되었다. 1941년 상고심에서는 사건 관련자가 대부분 친일파로 전락하였기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휴식을 겸한 다양한 취미활동이 포함되는 경제 활동 이외의 시간으로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자유시간·레저.
여가 (餘暇)
휴식을 겸한 다양한 취미활동이 포함되는 경제 활동 이외의 시간으로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자유시간·레저.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정치인.
정칠성 (丁七星)
일제강점기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정치인.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일제강점기 공주 영명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묘묵 (李卯默)
일제강점기 공주 영명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주세죽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 중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였고, 귀국 후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주도하였다.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소련에서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는 등 고난을 겪었다.
주세죽 (朱世竹)
주세죽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 여성해방운동가, 독립운동가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 중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였고, 귀국 후 사회주의 여성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를 주도하였다.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소련에서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는 등 고난을 겪었다.
일제강점기 때, 동우회와 독립의군부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윤이병 (尹履炳)
일제강점기 때, 동우회와 독립의군부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 임시정부 연락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선우훈 (鮮于燻)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 임시정부 연락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흥사단에서 활동하며 동우회를 조직하였고, 해방 이후, 미군정장관 고문,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동원 (金東元)
일제강점기 때, 흥사단에서 활동하며 동우회를 조직하였고, 해방 이후, 미군정장관 고문,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김천청년연맹 집행위원, 부산청년동맹 집행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칠성 (金七星)
일제강점기 때, 김천청년연맹 집행위원, 부산청년동맹 집행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해방 이후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한 기업인.
정봉규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한 기업인.
박학전은 해방 이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목사, 농촌운동가이다. 1905년 평안남도 안주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후 조만식의 지도 아래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3년 일본에서 종교교육과 사회사업을 공부한 후 이듬해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농사강습회 개최, 농촌지도자 양성, 협동조합·소비조합 결성 등 다양한 농촌운동에 힘썼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이듬해 농우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국제인권옹호회 경기도 본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사망하였다.
박학전 (朴鶴田)
박학전은 해방 이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목사, 농촌운동가이다. 1905년 평안남도 안주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후 조만식의 지도 아래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3년 일본에서 종교교육과 사회사업을 공부한 후 이듬해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농사강습회 개최, 농촌지도자 양성, 협동조합·소비조합 결성 등 다양한 농촌운동에 힘썼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이듬해 농우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국제인권옹호회 경기도 본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사망하였다.
춘천시장, 국회의원, 강원도지사, 대한민국헌정회 회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홍창섭 (洪昌燮)
춘천시장, 국회의원, 강원도지사, 대한민국헌정회 회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희망의 나라로」는 1933년 6월 『현제명작곡집』 제2집에 수록되어 있는 가곡이다. 현제명(玄濟明, 1903~1960) 작사 및 작곡으로 자신의 2번째 작곡집인 『현제명작곡집』에 수록된 12곡 중 10번째로 담겨 있다. 『현제명작곡집』 제2집은 현제명이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직 중 연희전문학교출판부에서 1933년 6월 25일에 출간한 가곡집이다. 이 노래는 밝고 경쾌하며 힘찬 선율이 특징이다.
희망의 나라로
「희망의 나라로」는 1933년 6월 『현제명작곡집』 제2집에 수록되어 있는 가곡이다. 현제명(玄濟明, 1903~1960) 작사 및 작곡으로 자신의 2번째 작곡집인 『현제명작곡집』에 수록된 12곡 중 10번째로 담겨 있다. 『현제명작곡집』 제2집은 현제명이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직 중 연희전문학교출판부에서 1933년 6월 25일에 출간한 가곡집이다. 이 노래는 밝고 경쾌하며 힘찬 선율이 특징이다.
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이다.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고,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또한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그 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홍난파 (洪蘭坡)
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이다.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고,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또한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그 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최윤호는 일제강점기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농민 교육 등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조선의 사립 교육과 농민 교육을 연구하였고,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울러 농촌 계몽과 농민 교육에도 힘썼다. 1937년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 1939년 2월 사망하였으며,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최윤호 (崔允鎬)
최윤호는 일제강점기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농민 교육 등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조선의 사립 교육과 농민 교육을 연구하였고,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울러 농촌 계몽과 농민 교육에도 힘썼다. 1937년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 1939년 2월 사망하였으며,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필상은 대한제국기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해남 일대의 의병과 함께 진도읍 습격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서로 호송 중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호송 경찰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이필상 (李弼相)
이필상은 대한제국기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해남 일대의 의병과 함께 진도읍 습격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서로 호송 중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호송 경찰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동아사진콘테스트'는 1963년, 동아일보사가 창설하여 1960년대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전개에 크게 기여한 사진 공모전이다. 「동아사진동우회」를 운영하면서 생활주의리얼리즘 사진을 확산시켰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함께 민전과 관전, 리얼리즘 사진과 예술 사진이라는 경쟁과 견제의 관계를 유지하며 1960년대 우리나라 사진계를 견인한 공모전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동아사진콘테스트 (東亞寫眞contest)
'동아사진콘테스트'는 1963년, 동아일보사가 창설하여 1960년대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전개에 크게 기여한 사진 공모전이다. 「동아사진동우회」를 운영하면서 생활주의리얼리즘 사진을 확산시켰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함께 민전과 관전, 리얼리즘 사진과 예술 사진이라는 경쟁과 견제의 관계를 유지하며 1960년대 우리나라 사진계를 견인한 공모전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