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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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
쌍성총관부 (雙城摠管府)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
혁신의회는 1928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삼부(三府) 통합운동의 과정에서 김동삼(金東三), 김좌진(金佐鎭), 지청천(池靑天)[일명 이청천(李靑天)] 등이 중심이 되고, 일부 좌익계열 단체가 합류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의 성격을 가진다. 재만 한인 보호, 대일 무장투쟁 등을 목표로 하고, 군정부(軍政府) 설립을 추진하였다.
혁신의회 (革新議會)
혁신의회는 1928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삼부(三府) 통합운동의 과정에서 김동삼(金東三), 김좌진(金佐鎭), 지청천(池靑天)[일명 이청천(李靑天)] 등이 중심이 되고, 일부 좌익계열 단체가 합류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의 성격을 가진다. 재만 한인 보호, 대일 무장투쟁 등을 목표로 하고, 군정부(軍政府) 설립을 추진하였다.
발해의 제1대(재위: 698년~719년) 왕.
고왕 (高王)
발해의 제1대(재위: 698년~719년) 왕.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智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삼법이 창건한 사찰.
지리산 쌍계사 (智異山 雙磎寺)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智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삼법이 창건한 사찰.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이다. 태토의 정선화, 타날성형,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와질토기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와질토기 기원은 전국시대 회도 혹은 낙랑토기가 남하하면서 전래되었다는 외부기원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와질토기 (瓦質土器)
와질토기(瓦質土器)는 실내가마에서 900℃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 낸 원삼국시대 영남 지역에서 유행한 회색의 약간 무른 토기이다. 태토의 정선화, 타날성형, 환원염 소성으로 구워지는 점 등이 와질토기의 특징으로 인정되며,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주머니호, 조합우각형 파수부장경호, 외반구연옹, 파수부호, 장동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와질토기 기원은 전국시대 회도 혹은 낙랑토기가 남하하면서 전래되었다는 외부기원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인물풍속도·장식무늬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대안 덕흥리 벽화 고분 (大安 德興里 壁畵 古墳)
북한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인물풍속도·장식무늬 관련 벽화무덤. 횡혈식석실분.
중생을 해롭게 한다는 탐욕·진에·우치를 총칭하는 불교교리.
삼독 (三毒)
중생을 해롭게 한다는 탐욕·진에·우치를 총칭하는 불교교리.
현도군은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군으로서 한사군의 하나이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낙랑군·진번군·임둔군과 함께 설치되었다가 임둔군·진번군이 폐지될 때 진번군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압록강 중류에 있던 군치(郡治)가 요동 혼하(渾河) 상류로 이동하였는데, 한인의 압박정치에 대한 토착인의 반발이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현도군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넓은 충적지대가 펼쳐져 있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현도군은 물론 한사군 모두가 요하(遼河) 서쪽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현도군 (玄菟郡)
현도군은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군으로서 한사군의 하나이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낙랑군·진번군·임둔군과 함께 설치되었다가 임둔군·진번군이 폐지될 때 진번군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압록강 중류에 있던 군치(郡治)가 요동 혼하(渾河) 상류로 이동하였는데, 한인의 압박정치에 대한 토착인의 반발이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현도군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넓은 충적지대가 펼쳐져 있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현도군은 물론 한사군 모두가 요하(遼河) 서쪽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주진군은 고려 전기 북방 국경지대인 북계와 동계의 주·진(州鎭)에 설치된 지방군이다. 고려의 국경지역는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리 방어주(防禦州)·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防禦使)와 진장(鎭長)을 임명하였다. 주현군과 비교해 병종이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고, 병력수도 훨씬 많다. 주·진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은 주진군 조직에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교대로 동원되다가 유사시에는 모든 병력이 동원되었다. 남도로부터 번상한 방수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방수장군의 지휘하에 국경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주·진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다.
주진군 (州鎭軍)
주진군은 고려 전기 북방 국경지대인 북계와 동계의 주·진(州鎭)에 설치된 지방군이다. 고려의 국경지역는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리 방어주(防禦州)·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防禦使)와 진장(鎭長)을 임명하였다. 주현군과 비교해 병종이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고, 병력수도 훨씬 많다. 주·진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은 주진군 조직에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교대로 동원되다가 유사시에는 모든 병력이 동원되었다. 남도로부터 번상한 방수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방수장군의 지휘하에 국경 방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주·진이 함락되면서 붕괴되었다.
문주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왕자로 있을 때 아버지 개로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역임했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자, 동맹국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국난의 상황에서 즉위한 문주왕은 웅진천도를 단행하여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으나 난립한 귀족 파벌간의 쟁투는 더 심각해졌고, 결국 재위 3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문주왕 (文周王)
문주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왕자로 있을 때 아버지 개로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역임했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자, 동맹국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국난의 상황에서 즉위한 문주왕은 웅진천도를 단행하여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으나 난립한 귀족 파벌간의 쟁투는 더 심각해졌고, 결국 재위 3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고려후기 형부시랑, 상서우승, 대장군 등을 역임한 무신.
박진재 (朴晉材)
고려후기 형부시랑, 상서우승, 대장군 등을 역임한 무신.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 차원에서 거행된 각종 의식과 행사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궁중행사도.
궁중기록화 (宮中記錄畵)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 차원에서 거행된 각종 의식과 행사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궁중행사도.
대한제국기 때, 전라남도 보성에서 의진을 결성한 의병장.
안규홍 (安圭洪)
대한제국기 때, 전라남도 보성에서 의진을 결성한 의병장.
남장사(南長寺)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 장백사(長栢寺)였으며 1186년에 남장사로 이름을 바꾼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하대에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처음 머문 사찰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번 고치고 새로 지었다. 보광전의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 등 여러 불교 문화유산이 전한다.
노악산 남장사 (露嶽山 南長寺)
남장사(南長寺)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 장백사(長栢寺)였으며 1186년에 남장사로 이름을 바꾼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하대에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처음 머문 사찰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번 고치고 새로 지었다. 보광전의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 등 여러 불교 문화유산이 전한다.
북계는 고려시대 현 평안도 지역에 편성된 광역의 지방 행정 구역이다. '북로(北路)', '서북로(西北路)', '서북면(西北面)', '서북로(西北路)'라고도 하였으며, 동계(東界)와 함께 고려의 변방인 양계(兩界)를 구성하였다. 국방을 주 임무로 하였으며 방어주(防禦州)와 진(鎭)이 설치되었다. 몽골과의 전쟁 과정에서 일시 몰입되었다가 충렬왕 때 돌려받았다.
북계 (北界)
북계는 고려시대 현 평안도 지역에 편성된 광역의 지방 행정 구역이다. '북로(北路)', '서북로(西北路)', '서북면(西北面)', '서북로(西北路)'라고도 하였으며, 동계(東界)와 함께 고려의 변방인 양계(兩界)를 구성하였다. 국방을 주 임무로 하였으며 방어주(防禦州)와 진(鎭)이 설치되었다. 몽골과의 전쟁 과정에서 일시 몰입되었다가 충렬왕 때 돌려받았다.
인천광역시 중구 해안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포구(浦口).
제물포 (濟物浦)
인천광역시 중구 해안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포구(浦口).
문성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재4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39~857년이다.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고,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문성왕 (文聖王)
문성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재4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39~857년이다.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고,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를 보답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 또는 그 사신.
사은사 (謝恩使)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를 보답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 또는 그 사신.
관방유적은 국경의 방비를 위하여 내륙이나 해안 또는 섬에 설치하는 보(堡)나 진(鎭), 목책(木柵), 수책(水柵), 포(浦), 포영(浦營), 행영(行營), 성(城) 등의 군사적 목적의 요새 시설이다. 국경지대나 해안의 요충지에 설치하여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성벽과 우물 또는 샘과, 연못 등을 갖추고 있으며, 군창(軍倉)을 두거나 봉수를 갖추어 유사시 긴박한 상황을 즉각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 이민족의 침입이 많았던 북계 지역과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다.
관방유적 (關防遺蹟)
관방유적은 국경의 방비를 위하여 내륙이나 해안 또는 섬에 설치하는 보(堡)나 진(鎭), 목책(木柵), 수책(水柵), 포(浦), 포영(浦營), 행영(行營), 성(城) 등의 군사적 목적의 요새 시설이다. 국경지대나 해안의 요충지에 설치하여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성벽과 우물 또는 샘과, 연못 등을 갖추고 있으며, 군창(軍倉)을 두거나 봉수를 갖추어 유사시 긴박한 상황을 즉각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 이민족의 침입이 많았던 북계 지역과 왜적의 침입이 잦았던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지역에 많이 설치되었다.
황제는 고대, 중국의 진시황(秦始皇) 이후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최고 지도자를 뜻하는 칭호이다. 군주에 대한 명칭으로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 만들었으며, 명칭에 수반되어 황제에게만 독점적으로 허용되는 호칭 · 의례 등도 생겨났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제후국의 위상이어서 황제를 칭하지 않았으나, 고려시대의 외왕내제(外王內帝)와 같이 부분적으로 황제국의 요소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라는 과도적 명칭을 거쳐 1897년에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이 황제 자리에 오르며 황제국 체제의 격식이 도입되었다.
황제 (皇帝)
황제는 고대, 중국의 진시황(秦始皇) 이후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최고 지도자를 뜻하는 칭호이다. 군주에 대한 명칭으로 진나라의 시황제가 처음 만들었으며, 명칭에 수반되어 황제에게만 독점적으로 허용되는 호칭 · 의례 등도 생겨났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제후국의 위상이어서 황제를 칭하지 않았으나, 고려시대의 외왕내제(外王內帝)와 같이 부분적으로 황제국의 요소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라는 과도적 명칭을 거쳐 1897년에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이 황제 자리에 오르며 황제국 체제의 격식이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