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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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동 토성은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한성 백제시대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으로 인정되는 유적이다. 한강에 잇닿은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현재 2.1㎞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을축년(1925) 대홍수 때 중요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발굴 조사 결과 판축 기법으로 축조된 거대한 토성일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왕궁 내 부속 건물로 추정되는 신전 건물지와 우물, 창고, 도로 및 관원들의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됨으로써 초기 백제시대의 왕성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서울 풍납동 토성 (서울 風納洞 土城)
서울 풍납동 토성은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한성 백제시대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으로 인정되는 유적이다. 한강에 잇닿은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을 띠고 있으며, 현재 2.1㎞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을축년(1925) 대홍수 때 중요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발굴 조사 결과 판축 기법으로 축조된 거대한 토성일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왕궁 내 부속 건물로 추정되는 신전 건물지와 우물, 창고, 도로 및 관원들의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됨으로써 초기 백제시대의 왕성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고구려가 도읍을 압록강변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사건.
평양천도 (平壤遷都)
고구려가 도읍을 압록강변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사건.
공주 공산성은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 웅진기의 왕성(王城)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 불렀다. 성벽은 현재 동벽 일부가 토성이고 나머지는 석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에 따라 백제 때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다가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웅진기에는 왕성이고, 사비기에는 북방성(北方城)이었으며, 통일신라 때는 웅천주(熊川州)의 치소성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충청 감영(監營)이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질 때 감영이 성내에 있었고,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공주 공산성 (公州 公山城)
공주 공산성은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 웅진기의 왕성(王城)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 불렀다. 성벽은 현재 동벽 일부가 토성이고 나머지는 석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에 따라 백제 때에는 토성으로 축조하였다가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웅진기에는 왕성이고, 사비기에는 북방성(北方城)이었으며, 통일신라 때는 웅천주(熊川州)의 치소성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충청 감영(監營)이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질 때 감영이 성내에 있었고,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성곽. 토성.
서울 몽촌토성 (서울 夢村土城)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성곽. 토성.
위례성은 한강 남쪽에 있었던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이다. 위례성이 한강 북쪽에서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례’라는 명칭은 우리 · 울타리, 아리수 · 욱리하, 어라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의미는 대체로 ‘큰 성’으로 보고 있다. 한수 남쪽의 위례성, 즉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위례성의 명칭은 4세기 중 · 후반부터 한성으로 변화하였다.
위례성 (慰禮城)
위례성은 한강 남쪽에 있었던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이다. 위례성이 한강 북쪽에서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처음부터 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례’라는 명칭은 우리 · 울타리, 아리수 · 욱리하, 어라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의미는 대체로 ‘큰 성’으로 보고 있다. 한수 남쪽의 위례성, 즉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서울 풍납동 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위례성의 명칭은 4세기 중 · 후반부터 한성으로 변화하였다.
졸본(卒本)은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에 있던 고구려의 첫 번째 도성이다. 오녀산성과 하고성자토성 등 고구려시대의 성 유적과 함께 고력묘자촌 고분군, 상고성자 고분군, 망강루 고분군 등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무덤 고분군이 밀집해 있다.
졸본 (卒本)
졸본(卒本)은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에 있던 고구려의 첫 번째 도성이다. 오녀산성과 하고성자토성 등 고구려시대의 성 유적과 함께 고력묘자촌 고분군, 상고성자 고분군, 망강루 고분군 등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무덤 고분군이 밀집해 있다.
김원룡은 해방 이후 『신라토기의 연구』, 『한국미술사연구』 등을 저술한 미술사학자이자 문인이며 화가이다. 1922년에 태어나 1993년에 사망했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현,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고고학과 미술사 분야의 개척자로 100여 편의 논문과 1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한국고고학개설』(1973), 『한국문화의 기원』(1977), 『한국미술사연구』(1987) 등이 있다. 한국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주창하였다.
김원룡 (金元龍)
김원룡은 해방 이후 『신라토기의 연구』, 『한국미술사연구』 등을 저술한 미술사학자이자 문인이며 화가이다. 1922년에 태어나 1993년에 사망했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현,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고고학과 미술사 분야의 개척자로 100여 편의 논문과 1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한국고고학개설』(1973), 『한국문화의 기원』(1977), 『한국미술사연구』(1987) 등이 있다. 한국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주창하였다.
항파두성은 삼별초 대몽 항쟁 유적이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위치하며 하귀리 해안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해발 140~200m 구릉상에 자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 고적 조에 주 서쪽 40리에 있고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한 뒤 김통정 무리들이 쌓은 것이라고 하였고 고토성 또한 삼별초가 쌓은 것이라 하였다. 조사 결과 항파두성은 내성인 항파두성과 외성인 고토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둘레 750m이고, 외성은 사대문을 갖춘 판축 토성으로 둘레 3.8km이다.
항파두성 (缸坡頭城)
항파두성은 삼별초 대몽 항쟁 유적이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위치하며 하귀리 해안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해발 140~200m 구릉상에 자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 고적 조에 주 서쪽 40리에 있고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한 뒤 김통정 무리들이 쌓은 것이라고 하였고 고토성 또한 삼별초가 쌓은 것이라 하였다. 조사 결과 항파두성은 내성인 항파두성과 외성인 고토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둘레 750m이고, 외성은 사대문을 갖춘 판축 토성으로 둘레 3.8km이다.
산성(山城)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곽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었다. 현존하는 성곽 중 왕성이나 도성, 조선시대의 읍성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성이다. 산성은 대부분 적의 공격을 관측하기 좋은 교통의 요충지에 구축되었다. 산성은 방어에 유리하지만 적의 포위 공격에 대비하여 성내에 집수 시설과 군수 물자를 비축해 두어야 하였다. 산성을 쌓는 방법은 축성 시기나 축성 주체에 따라 달랐으며, 군사적인 기능 외에 행정을 관할하는 치소성의 역할도 하었다.
산성 (山城)
산성(山城)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곽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성이 발달하었다. 현존하는 성곽 중 왕성이나 도성, 조선시대의 읍성을 제외하면 대부분 산성이다. 산성은 대부분 적의 공격을 관측하기 좋은 교통의 요충지에 구축되었다. 산성은 방어에 유리하지만 적의 포위 공격에 대비하여 성내에 집수 시설과 군수 물자를 비축해 두어야 하였다. 산성을 쌓는 방법은 축성 시기나 축성 주체에 따라 달랐으며, 군사적인 기능 외에 행정을 관할하는 치소성의 역할도 하었다.
해자는 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이다.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護城河)로 불리기도 한다. 선사시대 취락을 감싼 환호에서 유래하였는데, 주로 성곽이나 고분에 조성되었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곽을 방어하거나 식수를 확보하거나, 성 안의 물과 오물을 바깥으로 배출하거나, 선박을 이용하여 물자를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대형 고분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묘역을 확정하기 위해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을 축조하거나 고분을 조성할 때 주변에서 흙을 채취하면서 만들어진 웅덩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해자 (垓子)
해자는 성곽이나 고분의 둘레를 감싼 도랑이다. 주황(周隍), 구지(溝池), 외호(外壕), 호성하(護城河)로 불리기도 한다. 선사시대 취락을 감싼 환호에서 유래하였는데, 주로 성곽이나 고분에 조성되었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곽을 방어하거나 식수를 확보하거나, 성 안의 물과 오물을 바깥으로 배출하거나, 선박을 이용하여 물자를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대형 고분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묘역을 확정하기 위해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성을 축조하거나 고분을 조성할 때 주변에서 흙을 채취하면서 만들어진 웅덩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성곽을 만드는 건축기술.
축성술 (築城術)
성곽을 만드는 건축기술.
김해회현리패총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의 패총이다. 사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舊) 회현리패총과 봉황대유적 등을 묶어 김해봉황동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지역 금관가야인들의 중심 거주 지역으로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주위를 봉황토성이 둘러싸고 있다.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보전하고 있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김해 회현리 패총 (金海 會峴里 貝塚)
김해회현리패총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의 패총이다. 사적 제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舊) 회현리패총과 봉황대유적 등을 묶어 김해봉황동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지역 금관가야인들의 중심 거주 지역으로 왕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주위를 봉황토성이 둘러싸고 있다.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보전하고 있는 타임캡슐이라 할 수 있다.
청주 정북동 토성은 국가 사적으로,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평면 형태 방형의 판축 토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75m이다. 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인근의 평야에 조성되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토성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정북동 토성에 대한 그간 몇 차례의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성벽에 대한 절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토성의 축조 시기와 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현재 해자에 대한 발굴 조사가 완료되어 복원되었다.
청주 정북동 토성 (淸州 井北洞 土城)
청주 정북동 토성은 국가 사적으로,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평면 형태 방형의 판축 토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75m이다. 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인근의 평야에 조성되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토성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정북동 토성에 대한 그간 몇 차례의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성벽에 대한 절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토성의 축조 시기와 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현재 해자에 대한 발굴 조사가 완료되어 복원되었다.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은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조선 세종 21년(1439)에 석축으로 개축한 읍성이다. 본래 고려 현종 때 토성으로 축조하여 장기 지역의 치소성으로 사용하였으나 잦은 동여진 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개국 후 석축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3,664척, 높이 12척이다. 샘이 두 곳, 못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군창도 있었다고 전한다. 1991년 이후 6차례 이상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체성과 옹성문지, 수구 등에 대한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포항 장기읍성 (浦項 長鬐邑城)
포항 장기읍성(浦項 長鬐邑城)은 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조선 세종 21년(1439)에 석축으로 개축한 읍성이다. 본래 고려 현종 때 토성으로 축조하여 장기 지역의 치소성으로 사용하였으나 잦은 동여진 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개국 후 석축성으로 개축하였다. 성의 둘레는 3,664척, 높이 12척이다. 샘이 두 곳, 못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군창도 있었다고 전한다. 1991년 이후 6차례 이상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체성과 옹성문지, 수구 등에 대한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
안융진(安戎鎭)은 고려 전기 973년(광종 24)에 북계 지역에 설치한 진(鎭)이다. 이후 1033년(덕종 2)과 1137년(인종 15)에 다시 축성되었다. 안융진성은 평안남도 문덕군 신리에 위치한 토성(土城)이다. 안융진은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 시기에 주요 전장이 되었다.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거란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서희(徐熙)는 소손녕(蕭遜寧)과 강화 회담을 진행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안융진 (安戎鎭)
안융진(安戎鎭)은 고려 전기 973년(광종 24)에 북계 지역에 설치한 진(鎭)이다. 이후 1033년(덕종 2)과 1137년(인종 15)에 다시 축성되었다. 안융진성은 평안남도 문덕군 신리에 위치한 토성(土城)이다. 안융진은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 시기에 주요 전장이 되었다.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거란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서희(徐熙)는 소손녕(蕭遜寧)과 강화 회담을 진행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신석기·청동기시대의 토기로서 ‘구순각목토기(口脣刻目土器)’라고 부름.
골아가리토기 (골아가리土器)
신석기·청동기시대의 토기로서 ‘구순각목토기(口脣刻目土器)’라고 부름.
세발토기는 백제지역에서 출토되는 발이 세 개 달린 토기이다. 가장 전형적인 백제 토기로 뚜껑접시 형태의 둥그런 배신(杯身) 아래에 짧은 다리가 3개 달려 있어서 삼족토기라고도 한다. 한성기 초기에는 배신의 바닥이 매우 편평하며 바닥과 배신이 각을 이루는 형태로 서울 몽촌토성이나 풍납동 토성, 홍성 신금성 같은 생활유적에서만 출토되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사나 공헌용에 쓰이는 의기적인 성격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기에는 부장되는 사례가 줄어들어 부여 왕궁지와 동남리 건물지와 같은 중요 생활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세발토기 (三足土器)
세발토기는 백제지역에서 출토되는 발이 세 개 달린 토기이다. 가장 전형적인 백제 토기로 뚜껑접시 형태의 둥그런 배신(杯身) 아래에 짧은 다리가 3개 달려 있어서 삼족토기라고도 한다. 한성기 초기에는 배신의 바닥이 매우 편평하며 바닥과 배신이 각을 이루는 형태로 서울 몽촌토성이나 풍납동 토성, 홍성 신금성 같은 생활유적에서만 출토되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사나 공헌용에 쓰이는 의기적인 성격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기에는 부장되는 사례가 줄어들어 부여 왕궁지와 동남리 건물지와 같은 중요 생활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북한 평양직할시 대동강구역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나무 다리. 목교.
대동강다리 (大同江다리)
북한 평양직할시 대동강구역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나무 다리. 목교.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토성·저수시설 관련 마을터.
천안 백석동 선사유적 및 백제토성 (天安 百石洞 先史遺蹟 및 百濟土城)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토성·저수시설 관련 마을터.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濟州缸波頭里抗蒙遺蹟址)는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조성된 토성(항파두성, 항파두리성)으로, 13세기 후반 몽골 침략에 저항한 고려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이다. 1978년 유적지 정비를 실시한 후 1997년 4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濟州 缸波頭里 抗蒙遺蹟址)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濟州缸波頭里抗蒙遺蹟址)는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조성된 토성(항파두성, 항파두리성)으로, 13세기 후반 몽골 침략에 저항한 고려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이다. 1978년 유적지 정비를 실시한 후 1997년 4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