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항파두성은 고려시대 삼별초 대몽 항쟁의 마지막 보루로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 일대에 위치하며, 하귀리 해안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구릉상에 위치한다.
항파두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한 뒤 김통정 무리들이 쌓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적 조에 실려 있는 항파두고성 외에 고토성은 삼별초가 축조한 것이며 둘레 15리라고 한 것과 1272년(원종 13년) 전라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제주로 들어가 내 · 외성을 쌓았다는 기사, 1273년 김방경의 제주 정벌 기사를 참고하면 고토성이 항파두성의 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항파두성은 내성인 항파두성과 외성인 고토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 북쪽으로 외성과 연접하여 옹성이 자리하고 있다. 내성의 둘레는 750m이고 외성의 둘레는 기록에는 15리라고 하였으나 실측 결과 3.8km이다.
외성은 사대문을 갖춘 판축 토성으로 평면이 긴 타원형을 띠고 있지만 지형에 따라 불규칙한 형태를 하고 있다. 토루는 지형을 따라 경사면 위에 축조되기 때문에 풍화암 반토를 니은(ㄴ) 모양으로 굴착하여 정지한 다음 기저부의 석렬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판축을 위한 영정주를 설치하기 위한 초석을 석렬에서 3~4m 간격으로 석재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시설이 강화중성에서도 확인되었다.
중심 토루는 기저부 석렬 위로 판축하여 올렸고 토루의 내 · 외측에 150300cm 정도로 기와를 깔아 하단부 및 기저부 석렬을 덮고 있는데 중심 토루와 인접할수록 두껍게 깔았다. 이것은 토루가 침수로 인해 붕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석성에서 보이는 기단 보축 시설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항파두성 외성 중심 토루의 너비는 460486cm 정도이고 토루 내외의 기저부 보호 시설의 너비는 각각 242369cm, 170230cm로 전체 너비는 10m에 가깝다.
내성은 항파두성 외성 북쪽 중앙부에 위치하며,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 해발 160165m 사이에 자리하며 둘레 756m로 평면은 방형에 가깝다. 내성의 폭은 45m 정도로 내부에는 1열의 기저부 석렬을 설치하고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차하여 성토하였다. 내부가 비교적 편평한 내성에서는 20동의 건물지와 함께 일상생활 용기인 청자완과 접시를 중심으로 탁잔, 통형잔, 마상배 등과 철제 솥, 철정, 청동 수저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1호 건물지는 석재를 깔아 다른 건물지에 비해 높게 조성되어 삼별초군의 지휘소로 추정된다. 2-1호, 3호, 5호 건물지를 중심으로 다량의 찰갑편과 무구류, 철 슬러그 등이 확인되고 있어 무구 제작 관련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항파두성 내 취수원이었던 구시물 구유〔구시통〕는 지하에서 용출되는 구시물보다 2.5m 가량 내려온 곳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사각의 테두리 각목과 테두리 곽 내부로 4매의 판목으로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70cm 이상이다. 내부에서 수지문 기와편과 청자편이 출토되어 삼별초군이 항파두성을 점거할 당시의 유적에 해당된다.
항파두성은 1273년(고종 14) 6월 이전에 축성이 완료된 것으로 내부 건물지의 중복과 증개축 등으로 보아 김방경에 의해 함락된 후 원의 직접적인 지배를 위하여 상당 기간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항파두성이 제주 유일의 판축 토성으로 축조되었고 내 · 외성으로 이루어진 점 등은 고려시대 토성의 큰 특징을 보여 준다. 또한 제주도에 남아 있는 환해장성이나 애월목성, 동제원, 송담천 등 제주 지역 항몽 전적지 연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항파두성은 1976년 9월 '항파두리항몽유적지(缸波頭里抗蒙遺蹟址)'라는 이름의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호하고 있으며, 1978년에 유적지 정화 사업을 벌여 이곳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비롯한 관리사 · 전시관 · 휴게소 등을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