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군(定州郡)
1911년 105인사건 때 정주 출신의 정희순(鄭希淳)은 혹독한 고문으로 죽었고, 기소된 인사 가운데 44명이 이곳 출신이었다. 3·1운동 때 이승훈(李昇薰)·김진팔(金鎭八) 등에 의하여 사전 연락이 되어 있었으므로 3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또, 장날인 3월 31일 각지에서 2만 5000여 명이 모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벌였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의하면 집회횟수 18회, 집회인수 5만 5000명, 사망자수 120명, 부상자수 525명, 투옥자수 567명, 교회 소실 6개, 학교 소실 2개이다. 임시정부의 연통제조직에 있어서는 군감으로 조황균(趙煌均), 참사로 박병헌(朴秉憲)이 임명되었다. 1928년 2월 28일 침향농민회사건이 일어났으며, 1930년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광주학생사건 처리에 대한 항의시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