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張炯)은 1889년 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1894년부터 1905년까지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1905년 8월 사립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에 입학하여 1908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08년 4월에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법과(法科)에 입학하였으나,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고 더이상 학업에 몰두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9년 9월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신민회(新民會)의 비밀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09년에서 1910년 사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신민회의 지도자였던 양기탁(梁起鐸)‧ 유동열(柳東說)‧ 김구(金九)‧ 이시영(李始榮) 등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1911년 1월 일제가 ‘ 105인사건’을 계기로 양기탁과 유동열 등 신민회 회원을 대거 체포하자, 같은 해 2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 학생이었던 김연우(金淵祐)와 고정식(高正植) 등 조선 청년이 국외 망명을 시도하자 이들을 독립운동 전선에 합류하게 하는 등 1910년대 초반 경성‧안둥〔安東, 지금의 단둥〕‧봉천(奉天, 지금의 선양〔瀋陽〕) 등지를 왕복하면서 젊은 청년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같은 해 대종교(大淙敎)에 입교하여 소속된 민족운동가들과 깊은 연관을 맺으며 활동하였고, 이듬해 원로원참의(元老院參議)에 이르렀다.
1919년에 신흥무관학교 재정 담당인 이극(李極)과 함께 안창하(安昌夏)‧ 이진산(李震山)‧ 전덕명(全德明) 등 동지들을 만주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고, 이극을 통하여 전덕원(全德元)‧ 오동진(吳東振)‧ 오광선(吳光鮮) 등에게도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또 송병조(宋秉祚) 목사를 통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시영에게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1921년 11월부터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평화회의(워싱턴회의)’가 개최되자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길 희망하여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였다.
1921년 반도고학생친목회(半島苦學生親睦會)를 결성하여 강연 활동을 하고, 상공진흥회(商工振興會)를 결성하여 지역 경제인들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한의사로 활동하여 1923년 경성에 치료소를 개설하였다. 1927년 만선토지개간주식회사(滿鮮土地開墾株式會社) 사장에 취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의 활동을 위한 자금 지원을 하였다. 1932년 만주 지린성〔吉林省〕 반석현(磐石縣)에서 미곡상과 정미소를 운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조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 때문에 1930년에 “경성에 치료소를 설립하고 백병(百病)을 고친다고 1만 1천여 원의 거금을 편취하였다.”라는 죄목으로, 또 1938년에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거나 군자금 조달에 이용되던 정미소를 일본군 수비대가 방화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 행위를 주로 ‘사기죄’, ‘강도죄’ 등으로 처벌하거나 전시 체제하에서 예비 검속 차원에서 이들을 통제하려던 배경이 있었다.
8‧15광복 후 1946년 국민동지회(國民同志會) 회장이 되었고, 1947년 단국대학(檀國大學)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1948년 경영난에 봉착한 재단법인 백남학원(白南學院)을 인수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1960년 9월 4일 김홍일(金弘壹)과 함께 민강회(民强會)를 설립하여 ‘민권 신장’과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장형은 지속적으로 고학생‧빈자 등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기울여 성금이나 위로금을 기탁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64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