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산(李震山)은 1880년 경상북도 의성 출생이다.
1910년대 이회영(李會榮) · 이동녕(李東寧) 등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에 설립한 독립군 양성 학교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후원하였다.
1919년 4월 이상룡(李相龍) 등이 유하현 삼원보에서 서간도 지역의 독립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직한 한족회(韓族會)의 법무사장(法務司長)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한족회 통신원, 1920년 11월 한족회 사판사장(査判司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서간도 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3월 윤기섭과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여 서간도 지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 도착 초기에 이승만(李承晩)의 상하이 부임을 촉구하고, 민원식(閔元植) 등 직업적 친일 인사의 처단을 촉구하였다.
1921년 5월 여준(呂準) · 김동삼(金東三) 등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조를 촉구하는 결의서를 발송할 때 서간도 특파원으로 선임되었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군무국장을 맞이하여 조직을 재정비할 때 집행위원장 이탁(李沰)에 이어 경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참석차 윤기섭과 함께 서간도 대표로 상하이에 도착하여 한성정부안의 정식 승인 등을 요구하였다. 8월 임시의정원 의원 홍진(洪震) · 신익희(申翼熙) 등 2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워싱턴군축회의에 보냈다.
1922년 7월 상하이에서 안창호(安昌浩) · 여운형(呂運亨)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할 때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10월 서로군정서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파견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헌법기초위원회의 위원과 러시아령 자바이칼(Zabaikal) 대표자 적합 여부 특별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6월 창조파 40여 명이 국무위원제라는 새로운 정부 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김형식(金衡植)과 함께 한족회 대표로서 개조파 57인 명의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법개정기초위원에 임명되었으며, 9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에서 활동하였다. 9월 중순경 국민대표회의 개조파에 속하는 만주 지역 18개 독립 단체 대표들과 함께 통일군단 결성, 의용대 편성, 군자금 모집 문제 등을 의논하였다.
1924년 7월 전만통일발기문(全滿統一發起文)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서명하였고, 전만동포통일회(全滿同胞統一會)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될 때 서로군정서 대표로 중앙행정위원을 맡았다. 1925년 3월 정의부 중앙행정부 법무부 위원장, 8월 재무위원을 맡았다. 1926년 12월 지린성 반석(磐石)에서 정의부 · 한족노동당 · 남만청년총동맹 등이 발기한 조선혁명자후원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