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강석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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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은 1999년 9월 2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발표, 주장하고 있는 서해 5도상 군사분계선이다. 이 군사분계선은 북한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직후 유엔군 사령부가 서해 5도에 획정한 북방한계선(NLL)이 “정전협정을 통하지 않고 그어진 일방적 기선”이라고 강변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해상경계선이다.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西海 海上軍事分界線)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은 1999년 9월 2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발표, 주장하고 있는 서해 5도상 군사분계선이다. 이 군사분계선은 북한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직후 유엔군 사령부가 서해 5도에 획정한 북방한계선(NLL)이 “정전협정을 통하지 않고 그어진 일방적 기선”이라고 강변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해상경계선이다.
UAE 아크부대는 2011년 1월부터 대한민국이 아랍에미리트(UAE)에 파견하고 있는 특수 작전 교육 및 훈련 파견대이다. 이 부대는 육군의 특수전 사령부에 소속되어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통제를 받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연방군(聯邦軍)과의 국방 협력과 중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UAE 아크부대 (UAE Akh部隊)
UAE 아크부대는 2011년 1월부터 대한민국이 아랍에미리트(UAE)에 파견하고 있는 특수 작전 교육 및 훈련 파견대이다. 이 부대는 육군의 특수전 사령부에 소속되어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통제를 받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연방군(聯邦軍)과의 국방 협력과 중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9·19남북군사합의는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남북 정상 간에 맺은 ‘평양선언’의 군사 분야 부속 합의서이다. 이 합의에서는 남과 북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하였다. 이를 위해 남과 북은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9·19남북군사합의 (九一九南北軍事合意)
9·19남북군사합의는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남북 정상 간에 맺은 ‘평양선언’의 군사 분야 부속 합의서이다. 이 합의에서는 남과 북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하였다. 이를 위해 남과 북은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김영옥은 한국계 미국인 2세로,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군인이다. 1919년 1월 29일에 출생하여, 2005년 12월 29일 향년 86세로 영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전쟁 참전 영웅이자 한국·프랑스·이탈리아 등 3개국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그가 미국 및 한국 사회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사회 봉사 활동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김영옥 (金英玉)
김영옥은 한국계 미국인 2세로,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군인이다. 1919년 1월 29일에 출생하여, 2005년 12월 29일 향년 86세로 영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전쟁 참전 영웅이자 한국·프랑스·이탈리아 등 3개국에서 최고 무공 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다. 그가 미국 및 한국 사회에서 매우 큰 존경을 받는 이유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사회 봉사 활동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채명신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 출신로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이후에는 박정희의 '유신개헌'에 반대하여 1972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역 후에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등의 대사를 역임하였다. 이 밖에도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 대한해외참전전우회 명예회장,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회장,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채명신 (蔡命新)
채명신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 출신로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육군 5사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이후에는 박정희의 '유신개헌'에 반대하여 1972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역 후에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등의 대사를 역임하였다. 이 밖에도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 대한해외참전전우회 명예회장,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회장,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김일성이 항일혁명 당시 창설했다는 밀영(密營).
가라지봉밀영 (가라지峰密營)
김일성이 항일혁명 당시 창설했다는 밀영(密營).
김일성이 항일혁명투쟁 당시인 1938년 창설했다는 밀영(密營).
간백산밀영 (間白山密營)
김일성이 항일혁명투쟁 당시인 1938년 창설했다는 밀영(密營).
북한에서, 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정무원 총리 등을 역임한 관료.
강성산 (姜成山)
북한에서, 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정무원 총리 등을 역임한 관료.
경제국방 병진노선은 경제발전과 국방력 강화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북한의 경제정책 기조와 노선으로 경제국방 병진정책이라고도 한다. 북한의 경제정책 추진 기조와 노선의 핵심을 이룬다. 김일성은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1966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경제발전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8년 김정일 정권 출범 이후에는 이를 ‘선군경제건설노선’이라 개칭했다. 이 정책은 민생은 도외시한 채 핵, 중장거리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의 개발 등을 현실화시켰다.
경제국방 병진노선 (經濟國防 竝進路線)
경제국방 병진노선은 경제발전과 국방력 강화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북한의 경제정책 기조와 노선으로 경제국방 병진정책이라고도 한다. 북한의 경제정책 추진 기조와 노선의 핵심을 이룬다. 김일성은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1966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경제발전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8년 김정일 정권 출범 이후에는 이를 ‘선군경제건설노선’이라 개칭했다. 이 정책은 민생은 도외시한 채 핵, 중장거리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의 개발 등을 현실화시켰다.
북한의 예비전력 중 가장 핵심적인 조직.
교도대 (敎導隊)
북한의 예비전력 중 가장 핵심적인 조직.
대남공작기구는 북한정권의 목표인 ‘전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를 비밀리에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기구이다. 북한은 조선노동당 직속으로 대남전략기구를 설치, 운영해왔다. 1960∼1970년대에는 대남폭력투쟁과 간첩남파를 통한 한국내 지하조직망 구성·유지 등의 공작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에는 남북경협, 대북지원 확보 등을 통한 실리확보에 주력하였다. 2009년 초 대남공작기구를 개편하여 국방위원회 소속 정찰총국, 당소속 통일전선부, 225부 등을 배치하였다. 2010년 이후에는 정찰총국을 중심으로 남남갈등, 국론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대남공작기구 (對南工作機構)
대남공작기구는 북한정권의 목표인 ‘전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를 비밀리에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기구이다. 북한은 조선노동당 직속으로 대남전략기구를 설치, 운영해왔다. 1960∼1970년대에는 대남폭력투쟁과 간첩남파를 통한 한국내 지하조직망 구성·유지 등의 공작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에는 남북경협, 대북지원 확보 등을 통한 실리확보에 주력하였다. 2009년 초 대남공작기구를 개편하여 국방위원회 소속 정찰총국, 당소속 통일전선부, 225부 등을 배치하였다. 2010년 이후에는 정찰총국을 중심으로 남남갈등, 국론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북한이 1993년 4월 7일 대한민국의 김영삼 정부에 제시한 대남 요구사항을 말한다.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다는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가운데 “외세 의존 정책 포기, 남조선에서 미군 철수 의지 표명, 외국 군대와의 합동 군사훈련 영원히 중지,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날 것” 등 4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조선 혁명’을 유도하기 위한 통일전선 형성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정간섭적인 일방적인 요구이다. 이로써 마치 남북한간 평화통일에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입장과 자세를 표명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4개대남요구사항 (四個 對南要求事項)
북한이 1993년 4월 7일 대한민국의 김영삼 정부에 제시한 대남 요구사항을 말한다. 김일성이 직접 작성했다는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가운데 “외세 의존 정책 포기, 남조선에서 미군 철수 의지 표명, 외국 군대와의 합동 군사훈련 영원히 중지,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날 것” 등 4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조선 혁명’을 유도하기 위한 통일전선 형성에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정간섭적인 일방적인 요구이다. 이로써 마치 남북한간 평화통일에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입장과 자세를 표명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사회주의적 ‘새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북한당국이 1946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한 사상개조사업의 일환.
사상개조운동 (思想改造運動)
사회주의적 ‘새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북한당국이 1946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한 사상개조사업의 일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89년 7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177개국 22,0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진행된 축전이다. 진보성향 및 좌익계열에 속하는 세계청년학생들의 단결과 친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정치토론, 연대성집회, 상봉모임 등 정치행사와 문화예술활동, 체육경기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북한은 무리하게 행사 준비에 진력하여 이후 북한 경제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북한은 이 축전이 서울올림픽보다 참여자 수가 많고 규모가 큰 행사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체제선전용으로 활용하였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第十三次 世界靑年學生祝典)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89년 7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177개국 22,0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진행된 축전이다. 진보성향 및 좌익계열에 속하는 세계청년학생들의 단결과 친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정치토론, 연대성집회, 상봉모임 등 정치행사와 문화예술활동, 체육경기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북한은 무리하게 행사 준비에 진력하여 이후 북한 경제는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다. 북한은 이 축전이 서울올림픽보다 참여자 수가 많고 규모가 큰 행사였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체제선전용으로 활용하였다.
김일성의 출생연도인 1912년을 '주체1년'으로 정하여 산정하는 북한식 연도 표기법. 주체력.
주체연호 (主體年號)
김일성의 출생연도인 1912년을 '주체1년'으로 정하여 산정하는 북한식 연도 표기법. 주체력.
6.25전쟁 후 평양시 복구과정에서 14분에 살림집 1대를 조립할 정도로 빠른 속도의 성과를 거둔 것을 가리키는 북한용어.
평양속도 (平壤速度)
6.25전쟁 후 평양시 복구과정에서 14분에 살림집 1대를 조립할 정도로 빠른 속도의 성과를 거둔 것을 가리키는 북한용어.
황장엽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다가 김일성 사후에 남한으로 망명하여 반북활동을 진행한 교육자·관료이다. 1923년 출생하여 2010년 사망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이후 모스크바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54년에 귀국하여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 총장을 역임하였다. 주체사상 정립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김정일부자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일성 사후 북한 내 사상투쟁, 정치투쟁이 진행되는 도중인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김정일정권의 타도를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하였다.
황장엽
황장엽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다가 김일성 사후에 남한으로 망명하여 반북활동을 진행한 교육자·관료이다. 1923년 출생하여 2010년 사망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이후 모스크바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54년에 귀국하여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 총장을 역임하였다. 주체사상 정립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김정일부자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일성 사후 북한 내 사상투쟁, 정치투쟁이 진행되는 도중인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김정일정권의 타도를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