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노선희"
검색결과 총 10건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최봉윤 (崔鳳潤)
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전수산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을 역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이화학당을 졸업하였으며, 1916년 가족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15달러가량 매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대한부인구제회와 동지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이 밖에 하와이 한인 2세대를 위한 문화 활동 단체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무대 공연도 하였다.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전수산 (田壽山|Susan Chun Lee)
전수산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을 역임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이화학당을 졸업하였으며, 1916년 가족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15달러가량 매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대한부인구제회와 동지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이 밖에 하와이 한인 2세대를 위한 문화 활동 단체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무대 공연도 하였다.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강원신은 일제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신한부인회 회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남편 강영승 등 시댁 식구와 함께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갔다가 이후 미 대륙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월 캘리포니아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한인 여성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애썼으며, 대한인국민회 후원 활동도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후원금 및 각종 구호금을 보냈으며, 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도 수행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강원신 (康元信)
강원신은 일제강점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신한부인회 회장을 역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남편 강영승 등 시댁 식구와 함께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갔다가 이후 미 대륙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월 캘리포니아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한인 여성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애썼으며, 대한인국민회 후원 활동도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후원금 및 각종 구호금을 보냈으며, 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도 수행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숙영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항일운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으며, 가족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경위 등도 파악되지 않는다.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 제3분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광복군에 입대한 여성 대원들은 남성 대원들처럼 초모활동, 교육과 훈련, 선전, 한미 군사 합작 및 전략 첩보 활동, 국내진입작전과 정진대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세탁, 재봉, 구호대 등의 일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숙영 또한 유사한 활동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숙영 (金淑英)
김숙영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항일운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으며, 가족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 경위 등도 파악되지 않는다.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 제3분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광복군에 입대한 여성 대원들은 남성 대원들처럼 초모활동, 교육과 훈련, 선전, 한미 군사 합작 및 전략 첩보 활동, 국내진입작전과 정진대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세탁, 재봉, 구호대 등의 일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숙영 또한 유사한 활동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순도는 일제강점기 남만주, 상하이, 광둥 등지에서 민족운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1년에 105인사건 피의자로 구속되어 고문 끝에 풀려났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정부 요인의 신변을 보호하고, 상하이 지역 청년의 자모로 활동하였다. 항일 독립 문서를 배포하여 한인 교포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 투쟁에 필요한 무기 운반 등도 수행하였다. 이후 광둥에서 황포군관학교의 한국인 교관과 학생들을 후원하다가 병을 얻어 1928년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순도 (金順道)
김순도는 일제강점기 남만주, 상하이, 광둥 등지에서 민족운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1년에 105인사건 피의자로 구속되어 고문 끝에 풀려났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정부 요인의 신변을 보호하고, 상하이 지역 청년의 자모로 활동하였다. 항일 독립 문서를 배포하여 한인 교포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 투쟁에 필요한 무기 운반 등도 수행하였다. 이후 광둥에서 황포군관학교의 한국인 교관과 학생들을 후원하다가 병을 얻어 1928년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옥선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항일운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3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가계나 성장 과정, 중국 이주 과정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45년 1월경 중국 허난성 루이현에서 광복군 지하공작원 김철, 김기극과 접선하며 적지구공작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2월 탈출하여 5월 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김옥선 (金玉仙)
김옥선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항일운동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3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가계나 성장 과정, 중국 이주 과정 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45년 1월경 중국 허난성 루이현에서 광복군 지하공작원 김철, 김기극과 접선하며 적지구공작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2월 탈출하여 5월 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김정옥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3세 때 남편을 따라 중국 베이징으로 이주하였다. 1945년 3월 베이징에서 목연욱을 도와 적지구공작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광복군에 입대하였고,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김정옥 (金貞玉)
김정옥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3세 때 남편을 따라 중국 베이징으로 이주하였다. 1945년 3월 베이징에서 목연욱을 도와 적지구공작대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광복군에 입대하였고,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박금녀는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초모 및 선전 활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만보산사건 때 일본군에 피살된 박철규의 외동딸이다. 1945년 2월 구이더 지구에서 박재곤, 이헌일, 김응주, 김봉현 등과 초모 및 선전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에는 쉬저우 지구 특파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박금녀 (朴金女)
박금녀는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초모 및 선전 활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만보산사건 때 일본군에 피살된 박철규의 외동딸이다. 1945년 2월 구이더 지구에서 박재곤, 이헌일, 김응주, 김봉현 등과 초모 및 선전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에는 쉬저우 지구 특파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박신애는 일제강점기 하와이에서 애국부인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89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교사 출신 엘리트 여성으로, 사진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중국 내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였다. 박신애도 애국부인회 대표로 한국광복진선 구축에 참여하였다.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신애 (朴信愛)
박신애는 일제강점기 하와이에서 애국부인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89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교사 출신 엘리트 여성으로, 사진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중국 내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였다. 박신애도 애국부인회 대표로 한국광복진선 구축에 참여하였다.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애순은 1919년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월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문 50여 통을 전달받아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설득하여 3월 10일 광주 장날에 20여 명을 데리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조사 후 기소되었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박애순 (朴愛順)
박애순은 1919년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월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문 50여 통을 전달받아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설득하여 3월 10일 광주 장날에 20여 명을 데리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조사 후 기소되었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