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장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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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절은 고구려 후기,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12번째 관명(官名)으로 기록된 고구려의 관명이다. 명칭 외에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부절(不節), 또는 불과절(不過節) 같은 계열의 관명으로 파악되는데, 관직명이거나 중국의 유외품과 비슷한 성격으로 추정한다.
과절 (過節)
과절은 고구려 후기,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12번째 관명(官名)으로 기록된 고구려의 관명이다. 명칭 외에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부절(不節), 또는 불과절(不過節) 같은 계열의 관명으로 파악되는데, 관직명이거나 중국의 유외품과 비슷한 성격으로 추정한다.
대로(對盧)는 고구려시대의 관등이다. 나부 출신의 대가를 편제하는 관등이었던 패자에 비견되며,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패자의 기능을 대로가 대체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대로는 대대로로 분화되어 고구려 말기까지 최고위 관등으로 기능하였다.
대로 (對盧)
대로(對盧)는 고구려시대의 관등이다. 나부 출신의 대가를 편제하는 관등이었던 패자에 비견되며,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패자의 기능을 대로가 대체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대로는 대대로로 분화되어 고구려 말기까지 최고위 관등으로 기능하였다.
대사자(大使者)는 고구려시대에 사자(使者)에서 상향 분화하여 성립한 관등이다. 국왕이 수여한 사자를 대가의 사자와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성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중후기 관등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사자는 다시 태대사자와 대사자로 분화하였고, 12등(또는 13등)의 체계로 정립된 고구려 후기 관등제에서 제6위의 관등이었다.
대사자 (大使者)
대사자(大使者)는 고구려시대에 사자(使者)에서 상향 분화하여 성립한 관등이다. 국왕이 수여한 사자를 대가의 사자와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성립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 중후기 관등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사자는 다시 태대사자와 대사자로 분화하였고, 12등(또는 13등)의 체계로 정립된 고구려 후기 관등제에서 제6위의 관등이었다.
대승은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로서 47년(민중왕 4) 1만여 명의 무리와 함께 낙랑군에 투항하였다. 대승이 거느린 잠지락이라는 집단은 약 1만 명 규모였는데, 삼한의 소국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규모의 정치체 3~4개가 하나의 나부를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승 (戴升)
대승은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로서 47년(민중왕 4) 1만여 명의 무리와 함께 낙랑군에 투항하였다. 대승이 거느린 잠지락이라는 집단은 약 1만 명 규모였는데, 삼한의 소국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규모의 정치체 3~4개가 하나의 나부를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자(使者)는 삼국시대에 대가(大加) 예하 실무 조직의 직명(職名)으로 사용되기도 한 고구려의 관등이다. 계루부가 다른 나부를 견제하고, 나부의 중심세력이 부 내의 다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하였다고 보는데, 구체적으로는 조세 수취를 담당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사자의 관명은 대사자와 사자로 분화되어 고구려 관등제의 한 축을 이루었다.
사자 (使者)
사자(使者)는 삼국시대에 대가(大加) 예하 실무 조직의 직명(職名)으로 사용되기도 한 고구려의 관등이다. 계루부가 다른 나부를 견제하고, 나부의 중심세력이 부 내의 다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하였다고 보는데, 구체적으로는 조세 수취를 담당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사자의 관명은 대사자와 사자로 분화되어 고구려 관등제의 한 축을 이루었다.
상가(相加)는 삼국시대, 고구려 초기의 관명이다. 고구려를 구성한 나부의 수장으로 보거나, 제가회의의 주재자인 국상과 동일한 관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제가회의의 장인 상가와 군신회의의 장인 국상을 구분하여 이해하거나, 군신회의의 장인 상과 토착 수장을 가리키는 가로 분리해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상가 (相加)
상가(相加)는 삼국시대, 고구려 초기의 관명이다. 고구려를 구성한 나부의 수장으로 보거나, 제가회의의 주재자인 국상과 동일한 관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제가회의의 장인 상가와 군신회의의 장인 국상을 구분하여 이해하거나, 군신회의의 장인 상과 토착 수장을 가리키는 가로 분리해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소노부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국가를 구성한 하위 정치체이다. 초기 고구려를 구성한 5부 중 하나로, 계루부에 앞서 고구려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비류나부와 동일한 실체로 파악된다. 계루부로 왕위를 넘긴 이후에도 3세기 중반까지 독자성과 정치적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노부 (消奴部)
소노부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국가를 구성한 하위 정치체이다. 초기 고구려를 구성한 5부 중 하나로, 계루부에 앞서 고구려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비류나부와 동일한 실체로 파악된다. 계루부로 왕위를 넘긴 이후에도 3세기 중반까지 독자성과 정치적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순노부는 삼국시대 고구려 초기의 오부(五部) 중 하나인 정치체이다. 다른 노부와 달리 『삼국사기』에서의 나부와 대응시키기가 쉽지 않지만, 대체로 환나부와 동일한 실체로 파악된다. 소노부나 절노부보다 세력이 약하여 비교적 일찍 계루부의 통제력이 강하게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순노부 (順奴部)
순노부는 삼국시대 고구려 초기의 오부(五部) 중 하나인 정치체이다. 다른 노부와 달리 『삼국사기』에서의 나부와 대응시키기가 쉽지 않지만, 대체로 환나부와 동일한 실체로 파악된다. 소노부나 절노부보다 세력이 약하여 비교적 일찍 계루부의 통제력이 강하게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지태는 청주 출신으로 태봉의 관리였다. 궁예의 총애를 얻기 위해 같은 청주 사람들을 참소하였지만, 왕건에 의해 모함한 사실이 드러나 처벌받았다. ‘아지태 사건’은 태봉 내부의 정세가 변화하고, 918년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파악된다.
아지태 (阿志泰)
아지태는 청주 출신으로 태봉의 관리였다. 궁예의 총애를 얻기 위해 같은 청주 사람들을 참소하였지만, 왕건에 의해 모함한 사실이 드러나 처벌받았다. ‘아지태 사건’은 태봉 내부의 정세가 변화하고, 918년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파악된다.
종간은 승려 출신으로, 태봉 말 소판(蘇判)의 지위에 있던 궁예의 측근 관리였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직후 내군장군 은부와 함께 처형되었다. 종간이 간사하고 모함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궁예 정권의 부당함을 부각시켜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파악하기도 한다.
종간 (宗偘)
종간은 승려 출신으로, 태봉 말 소판(蘇判)의 지위에 있던 궁예의 측근 관리였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한 직후 내군장군 은부와 함께 처형되었다. 종간이 간사하고 모함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궁예 정권의 부당함을 부각시켜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파악하기도 한다.
좌보는 고구려 초기에 우보와 함께 국정 운영을 주도한 최고위 관직이다. 대무신왕 대에 처음 확인되며, 신대왕 즉위 이후 국상으로 통합되었다. 좌 ‧ 우보제의 시행은 계루부와 나부 지배층이 제가회의를 통해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나부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좌보 (左輔)
좌보는 고구려 초기에 우보와 함께 국정 운영을 주도한 최고위 관직이다. 대무신왕 대에 처음 확인되며, 신대왕 즉위 이후 국상으로 통합되었다. 좌 ‧ 우보제의 시행은 계루부와 나부 지배층이 제가회의를 통해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나부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파악되지만,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