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최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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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상 내외 상복은 1970년 5월 이해상 내외가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상복 일습이다. 굴건(屈巾), 건(巾), 수질(首絰), 최의(衰衣), 상(裳), 요질(腰紩), 중단(中單), 대수장군(大袖長裙), 행전(行纏)의 총 9점이다. 이해상은 고종의 사촌인 완순군 이재완의 아들인 이달용의 3남으로, 영왕과는 재종질 관계이다.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전통 상복 중 착용자가 명확한 남녀 상복 일습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해상 내외 상복 (이해상 內外 喪服)
이해상 내외 상복은 1970년 5월 이해상 내외가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상복 일습이다. 굴건(屈巾), 건(巾), 수질(首絰), 최의(衰衣), 상(裳), 요질(腰紩), 중단(中單), 대수장군(大袖長裙), 행전(行纏)의 총 9점이다. 이해상은 고종의 사촌인 완순군 이재완의 아들인 이달용의 3남으로, 영왕과는 재종질 관계이다.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전통 상복 중 착용자가 명확한 남녀 상복 일습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최의는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입었던 전통 상복의 윗옷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최의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이해상 내외의 상복 일습을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최의가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최의 (衰衣)
최의는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입었던 전통 상복의 윗옷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최의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이해상 내외의 상복 일습을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최의가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최상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입었던 전통 상복의 아래옷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최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해상은 고종 황제의 사촌인 완순군 이재완의 아들인 이달용의 3남으로, 영친왕과는 재종질 관계의 인물이다.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 여자 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이해상 내외 상복 일습을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최상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최상 (衰裳)
최상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입었던 전통 상복의 아래옷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최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해상은 고종 황제의 사촌인 완순군 이재완의 아들인 이달용의 3남으로, 영친왕과는 재종질 관계의 인물이다.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 여자 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이해상 내외 상복 일습을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최상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수질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사용하였던 굴건 위에 두른 띠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굴건 위에 둘렀던 수질이 가장 대표적이다. 삼끈 두 가닥을 꼬아서 제작하여 만드는 것으로 참최는 저마(苴麻), 재최 이하는 무마(牡麻), 소공 · 시마는 조마(澡麻)를 사용하며 이는 요질(腰絰)의 제도와 동일하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고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수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수질 (首絰)
수질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사용하였던 굴건 위에 두른 띠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굴건 위에 둘렀던 수질이 가장 대표적이다. 삼끈 두 가닥을 꼬아서 제작하여 만드는 것으로 참최는 저마(苴麻), 재최 이하는 무마(牡麻), 소공 · 시마는 조마(澡麻)를 사용하며 이는 요질(腰絰)의 제도와 동일하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고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수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요질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허리에 두르는 띠이다. 1970년 5월 이해상 내외가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허리에 둘렀던 요질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것은 삼끈 두 가닥을 꼬아서 만드는 것으로 참최는 저마(苴麻), 재최 이하는 무마(牡麻), 소공 · 시마는 조마(澡麻)를 사용하며 이는 수질의 제도와 동일하다. 영친왕의 재종질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고 졸업생인 이남주가 이해상 내외의 상복을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여기에 요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요질 (腰絰)
요질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허리에 두르는 띠이다. 1970년 5월 이해상 내외가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허리에 둘렀던 요질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것은 삼끈 두 가닥을 꼬아서 만드는 것으로 참최는 저마(苴麻), 재최 이하는 무마(牡麻), 소공 · 시마는 조마(澡麻)를 사용하며 이는 수질의 제도와 동일하다. 영친왕의 재종질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고 졸업생인 이남주가 이해상 내외의 상복을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여기에 요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굴건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사용하였던 쓰개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썼던 굴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상주가 착용할 때는 굴건 안에 두건을 받쳐 쓰고 그 위에 수질을 이마에 둘러 고정한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굴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굴건 (屈巾)
굴건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사용하였던 쓰개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썼던 굴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상주가 착용할 때는 굴건 안에 두건을 받쳐 쓰고 그 위에 수질을 이마에 둘러 고정한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굴건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대수장군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저고리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든 여성 상복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의 부인인 신계완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대수장군이 대표적이다. 큰소매의 웃옷[大袖]과 긴치마[長裙]를 하나로 연결한 여성 상복이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대수장군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대수장군 (大袖長裙)
대수장군은 조선시대 이래 상례 때 저고리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하여 만든 여성 상복이다. 1970년 5월 이해상의 부인인 신계완이 영친왕 이은의 장례 때 착용했던 대수장군이 대표적이다. 큰소매의 웃옷[大袖]과 긴치마[長裙]를 하나로 연결한 여성 상복이다. 영친왕의 재종질(再從姪)인 이해상과 신계완의 딸이자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이남주가 경기여자고등학교 경운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에 대수장군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희귀한 전통 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복변제절목」은 1884년(고종 21) 사복(私服)의 개정을 규정한 절목(節目)이다. 사복은 귀천을 막론하고 착수의를 입고, 도포· 직령·창의·중의 등의 옷은 폐지한다. 또 관원의 사복은 착수의에 전복(戰服), 답호(搭護)를 덧입은 후 사대를 매게 하였다. 이 외, 관청의 서리들이 단령을 입는 것을 폐지하고, 유생은 왕을 알현할 때 입는 옷, 재복(齋服), 유건(儒巾), 화(靴)는 이전과 같지만 나머지 상황에서는 반령착수(盤領窄袖)에 실띠[絲帶]를 매게 하였다. 생원, 진사, 유학의 사복 소매를 좁게 하였다.
사복변제절목 (私服變制節目)
「사복변제절목」은 1884년(고종 21) 사복(私服)의 개정을 규정한 절목(節目)이다. 사복은 귀천을 막론하고 착수의를 입고, 도포· 직령·창의·중의 등의 옷은 폐지한다. 또 관원의 사복은 착수의에 전복(戰服), 답호(搭護)를 덧입은 후 사대를 매게 하였다. 이 외, 관청의 서리들이 단령을 입는 것을 폐지하고, 유생은 왕을 알현할 때 입는 옷, 재복(齋服), 유건(儒巾), 화(靴)는 이전과 같지만 나머지 상황에서는 반령착수(盤領窄袖)에 실띠[絲帶]를 매게 하였다. 생원, 진사, 유학의 사복 소매를 좁게 하였다.
통치마는 개항기에 치마폭을 이어 통으로 만든 치마이다. 이 치마는 전통치마인 자락치마에 부분적으로 조끼허리를 달아서 치마의 트인 곳을 모두 박아 통으로 만들고 길이를 짧게 만든 치마이다. 조선시대의 자락치마는 길이가 길고 옷감이 많이 들며 속옷이 복잡하여, 활동할 때 한쪽 자락을 손으로 여미고 다녀야만 하는 불편하고 비경제적인 옷으로 인식되었다. 통치마는 땅에 끌리던 치마 길이를 짧게 하고 트인 곳을 모두 막아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실용적인 옷이었다.
통치마
통치마는 개항기에 치마폭을 이어 통으로 만든 치마이다. 이 치마는 전통치마인 자락치마에 부분적으로 조끼허리를 달아서 치마의 트인 곳을 모두 박아 통으로 만들고 길이를 짧게 만든 치마이다. 조선시대의 자락치마는 길이가 길고 옷감이 많이 들며 속옷이 복잡하여, 활동할 때 한쪽 자락을 손으로 여미고 다녀야만 하는 불편하고 비경제적인 옷으로 인식되었다. 통치마는 땅에 끌리던 치마 길이를 짧게 하고 트인 곳을 모두 막아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실용적인 옷이었다.
양관은 조선시대 관리가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차림에 쓰는 관모이다. 이마에서부터 둥글게 머리를 덮으며, 관의 뒷면에 닿는 너비 10cm 내외의 양(梁)과 머리둘레를 싸는 무(武), 관의 뒷면을 장식하는 투조장식판인 배면(背面), 관을 고정하는 목잠(木簪)으로 이루어진다. 금관은 무와 배면, 비녀를 모두 금색으로 칠하고, 제관은 흑색으로 칠을 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품계에 따라 1품은 5량, 2품은 4량, 3품은 3량, 4․5․6품은 2량, 7․8․9품은 1량으로 양에 부착된 금선 장식의 수(數)에 차이를 두었다.
양관 (梁冠)
양관은 조선시대 관리가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차림에 쓰는 관모이다. 이마에서부터 둥글게 머리를 덮으며, 관의 뒷면에 닿는 너비 10cm 내외의 양(梁)과 머리둘레를 싸는 무(武), 관의 뒷면을 장식하는 투조장식판인 배면(背面), 관을 고정하는 목잠(木簪)으로 이루어진다. 금관은 무와 배면, 비녀를 모두 금색으로 칠하고, 제관은 흑색으로 칠을 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품계에 따라 1품은 5량, 2품은 4량, 3품은 3량, 4․5․6품은 2량, 7․8․9품은 1량으로 양에 부착된 금선 장식의 수(數)에 차이를 두었다.
주로 남성이 입는 서양식 의복.
양복 (洋服)
주로 남성이 입는 서양식 의복.
진주는 조개류의 체내에서 형성되는 구슬 모양의 분비물 덩어리이다. 진주는 바다에 사는 조개류에서 주로 만들어진다. 인공적으로 조개 속에 진주핵을 집어넣어 기른 것을 양식진주라고 한다. 이것이 전체 진주 거래량의 약 90%를 차지한다. 진주의 가치는 표면 광택의 선명도와 구형의 정도, 순도, 색상 등에 의해 평가된다. 색상이 균질하고 둥글수록, 대칭성이 양호할수록, 표면에 주름이나 얼룩이 없을수록 고가이다. 현재 조선 시대의 진주 장신구나 장식품 유물들이 남아 있다. 진주는 예로부터 건강·부귀·장수를 상징하여 사람들이 선호했다.
진주 (眞珠)
진주는 조개류의 체내에서 형성되는 구슬 모양의 분비물 덩어리이다. 진주는 바다에 사는 조개류에서 주로 만들어진다. 인공적으로 조개 속에 진주핵을 집어넣어 기른 것을 양식진주라고 한다. 이것이 전체 진주 거래량의 약 90%를 차지한다. 진주의 가치는 표면 광택의 선명도와 구형의 정도, 순도, 색상 등에 의해 평가된다. 색상이 균질하고 둥글수록, 대칭성이 양호할수록, 표면에 주름이나 얼룩이 없을수록 고가이다. 현재 조선 시대의 진주 장신구나 장식품 유물들이 남아 있다. 진주는 예로부터 건강·부귀·장수를 상징하여 사람들이 선호했다.
누비장은 누비 기법으로 바느질을 하는 장인이다. 일반 바느질은 물론 누비는 기술을 겸한 특수한 장인이다. 누비는 옷감의 강도와 보온을 위해 사용된 기법으로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누비는 기법이 단순하고 쉽지만 세탁 후 바느질 모양이 틀어지지 않고 솜에 의해 시접 자국이 생기지 않아 실용적이다. 근대 이후 손누비는 대중화되지 못했고, 1910년 이후에는 재봉틀의 사용으로 기계 누비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누비장은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 김해자는 1996년 중요무형유산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생전에 활발히 홛동하였다.
누비장 (縷緋匠)
누비장은 누비 기법으로 바느질을 하는 장인이다. 일반 바느질은 물론 누비는 기술을 겸한 특수한 장인이다. 누비는 옷감의 강도와 보온을 위해 사용된 기법으로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누비는 기법이 단순하고 쉽지만 세탁 후 바느질 모양이 틀어지지 않고 솜에 의해 시접 자국이 생기지 않아 실용적이다. 근대 이후 손누비는 대중화되지 못했고, 1910년 이후에는 재봉틀의 사용으로 기계 누비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누비장은 199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 김해자는 1996년 중요무형유산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생전에 활발히 홛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