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대기의 온도와 기압 차에 의해 공기가 이동하는 기상현상이다. 지구상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의 순환은 매우 큰 규모의 대기 이동으로 편동풍·편서풍·제트류 등이 있다. 작은 규모의 대기 순환에는 육풍과 해풍, 산바람과 골바람 및 한국 특유의 국지바람인 양간지풍이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꽃가루를 날려 나무나 식물에 열매를 맺게 하고 풍력발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문학작품에서 바람은 삶에 부닥치는 여러 애환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기상 요소이지만, 강한 바람은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에 예로부터 관측해 왔다.
기압차가 생기는 원인은 몇 가지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소규모의 기압차는 지역적인 수열량(受熱量)의 차이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고, 일기도에서 볼 수 있는 고기압 · 저기압에 수반되는 대규모의 기압차는 위도에 따른 기온차가 원인이 되거나 지구 자전에 의한 전향력이 공기에 작용되기 때문이다.
지구상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의 순환은 매우 큰 규모의 대기이동으로서 편동풍(무역풍 · 극풍) · 편서풍 · 제트류 등이 있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작은 규모의 대기 순환으로서는 육풍과 해풍, 산바람과 골바람 및 한국 특유의 국지바람인 양간지풍(襄杆之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계절풍을 조사해 보면 11∼3월 사이에는 북서 계절풍이 불고, 5∼9월 사이에는 남동 계절풍이 불며, 환절기인 4월과 10월 경에는 특히 뚜렷하게 탁월한 방향의 바람이 없다. 겨울 계절풍은 풍력이 강하고 한랭건조한 데 비하여 여름 계절풍은 풍력이 약하고 고온다습하여,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몹시 무더운 날씨를 나타낸다.
한국은 위도가 비교적 낮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위도상에 있어서 대륙 내부를 제외하면 세계적인 저온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현저한 고온현상을 나타내는 관계로 연교차가 대단히 커서 완연한 대륙성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강수량도 계절풍대 강우형에 속해 있어서 여름철에 연강수량의 60% 가량이 내리게 되어 우기와 건기가 명확히 구별되는 특색을 나타낸다.
또 육풍과 해풍은 여름철에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바람이 약한 여름철에 육지와 바다의 수열량(受熱量) 차이 즉 온도차에 의해 해안지방에서 낮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해풍이, 밤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육풍이 불게 된다.
산바람과 골바람도 산꼭대기와 골짜기의 수열량 차이 때문에 생기는 바람으로서, 낮에는 산허리를 따라 골짜기로부터 산꼭대기로 골바람이 불어 올라가고, 밤에는 이와 반대로 산바람이 산허리를 불어 내리며, 겨울철에 잘 발달한다. 육풍과 해풍, 산바람과 골바람은 다 같이 밤 · 낮으로 바람 방향이 바뀌어진다. 만약 이 바람이 변동을 일으켰을 때에는 날씨 변화의 징조가 된다.
우리나라 특유의 국지바람으로는 양간지풍이 있다. 이것은 봄철 영동지방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이한 기상현상으로서 옛부터 속설로 전해져 왔으나, 언제부터인가 양강지풍으로 와전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양간지풍이란 양양(襄陽)과 간성(杆城)의 첫머리 글자를 딴 그 지방 특유의 국지바람을 일컫는 말이다.
영동지방의 봄철 기후를 살펴보면 다른 지방과 달리 바람이 매우 강한 것이 특징이다. 과거의 기후기록에서 평균 최대 풍속의 극값을 살펴보면 영동 남부에 위치한 삼척지방에서는 1983년 4월 27일에 14.0m/sec, 속초지방에서는 1980년 4월 19일 46.0m/sec의 강한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풍속의 극값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영동 중북부지방이 영동 남부지방에 비해서 봄철에 강풍이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4월에 이러한 강풍 현상이 주로 나타난다.
4월중 강풍 현상이 나타났을 때의 기압 배치를 살펴보면 주로 남고북저형 기압배치로서 만주지방에 발달한 저기압이 위치해 있고, 남해 먼바다의 동중국해 해상이나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이동성 고기압이 있을 때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있는 이동성 고기압으로부터 불어오는 남서풍이 태백산맥을 넘을 때 산악효과에 의하여 강풍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러나 기후적으로 볼 때 영동 중북부지방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주로 봄철인 4월 경에 강한 남서풍이 자주 분다. 따라서 영동 중북부지방 일원, 즉 양양에서 강릉에 걸쳐 폭넓게 부는 바람이란 뜻에서 ‘양강지풍’이란 새로운 용어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7∼9월 경에 한국에 영향을 주는 태풍은 북태평양 서쪽해상에서 발생된 열대성 저기압 중 중심 부근의 최대풍속이 17m/sec 이상 되는 것으로서, 연간 28개 정도가 발생된다. 그 중 한국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것은 평균 1∼2개 정도이다. 태풍은 심한 폭풍우를 동반하므로 엄청난 풍수해를 일으킨다.
1959년 9월 17일에 한국 남동해안지방을 강타한 태풍 사라(Sarah)는 사망 및 실종 849명, 부상 2,533명, 이재민 37만여명이라는 큰 피해를 냄으로써 한국을 통과한 태풍 중 가장 규모가 큰 A급 태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풍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자원 확보에는 도움이 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바람은 벡터량으로서 방향과 크기를 동시에 표현하게 된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은 풍향(風向)으로서 시시각각 변하게 되므로, 기상관측에서는 관측시각 전 10분간의 평균적인 풍향을 측정하게 된다. 풍향은 16방위로 관측하며 북서(NW) · 남동(SE) 등과 같이 영문부호로 표시한다. 풍향을 측정하는 기구로는 복엽풍향계와 셀신형풍향계가 있다.
복엽풍향계는 간단한 기구로서 일반교육용 정도로 쓰이지만, 셀신형풍향계 중 에어로벤의 측정기구는 프로펠러식 자기(自記)풍향풍속계로서 기상청이나 관측소에서 바람을 관측할 때 사용된다. 풍속(風速)은 대기의 수평적 흐름의 속도로서 지면으로부터의 높이에 따라 다르므로 지상 10m에서의 풍속을 표준으로 한다.
풍속도 풍향처럼 시시각각 변하므로 관측시각 전 10분간의 평균풍속을 말하게 된다. 10분간 평균의 최대 풍속값은 로빈슨 풍속계의 자기전접계수기에서 취하고, 순간 최대 풍속값은 에어로벤풍속자기지상에서 취한다. 그밖에 옛날부터 사용되어 오던 풍속계로는 컵 풍속계가 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도 눈대중으로 바람을 측정할 수 있는데, 이 때 보퍼트풍력계급표를 사용하게 된다.
옛 문헌에서 바람에 관한 명칭을 살펴보면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어나 방언 연구에 의하면, 바람의 명칭이 방위로서 불린 것이 많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동풍은 사(沙), 북동풍은 고사(高沙), 남풍은 마(麻), 남동풍은 긴마(緊麻), 서풍은 한의(寒意), 남서풍은 완한의(緩寒意) 또는 완마(緩麻), 북서풍은 긴한의(緊寒意), 북풍은 고(高) 또는 후(後)로 되어 있다.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는 샛(沙)바람, 하늬(寒意)바람, 마(麻)파람, 높(高)바람 또는 뒷(後)바람 등의 명칭은 이것에 기원한다. 남쪽 섬지방에서 불리고 있는 바람의 명칭은 『성호사설』의 팔방풍(八方風)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명칭과 그 방위는 그 섬의 위치 및 지형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바람의 명칭은 방향을 말하는 고어만이 아니라 옛날로 올라가면 팔괘(八卦)에서 쓰이는 방위 명칭을 사용한 것도 있다. 즉 진(震)은 동, 손(巽)은 남동, 이(離)는 남, 곤(坤)은 남서, 태(兌)는 서, 건(乾)은 북서, 감(坎)은 북, 간(艮)은 북동의 팔방위이다.
바람은 우리 생활에 필요한 기상 요소이지만, 정도 이상의 강한 바람은 무서운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에 예로부터 바람에 대한 관측이 시행되어왔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바람에 대한 기록을 보면, 바람은 풍(風) · 대풍(大風) · 폭풍(暴風)으로 구분되어 있다. 단순한 풍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 한 번 있고(300년), 대풍은 여름에 가장 많아 10회, 봄이 다음으로 8회, 가을이 3회, 겨울이 2회의 순으로 총 23회가 기록되어 있다. 여름에 대풍의 빈도가 큰 것이 특색이며 폭풍은 봄과 여름에 나타나고 있다.
바람의 강도는 나무가 부러졌다거나 혹은 나무가 뽑혔다, 기와가 날았다, 건물이 무너졌다는 등 바람에 의한 피해상황을 묘사 기록하고 있다. 그 중 가장 극심한 피해가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에 “ 성덕왕 15년(716) 3월 큰바람이 불어서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았으며 숭례전(崇禮殿)이 훼손되었다.”는 것과 제10에 “ 소성왕 20년(800) 4월 폭풍이 불어서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았으며 임해(臨海)와 인화(仁化) 두 문이 무너지고 서란전(瑞蘭殿)의 발[簾]이 날아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라는 등의 기록이다.
그 밖에 바람과 비가 겹친 풍우(風雨)가 600년에, 눈이 겹친 풍설(風雪)이 671년에, 안개가 겹친 풍무(風霧)가 814년에 각각 1회씩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바람에 관한 많은기록에서 바람방향에 대한 기록은 극히 드물며 남풍(96년) · 동풍(122년)이 불었다는 기록이 각각 한번씩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는 바람의 종류가 풍 · 대풍 · 폭풍 외 바람의 특성 및 바람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다만 풍 · 대풍 · 폭풍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던 것이 『고려사』에서는 종류가 많이 늘어나 있다 〈표 1〉. 바람의 등급에 따른 구분은 대풍 · 폭풍이 대부분이나 구풍(颶風) · 질풍(疾風) · 열풍(烈風) 등이 1∼2회 정도 기록되어 있다.
종류\월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계 |
---|---|---|---|---|---|---|---|---|---|---|---|---|---|
大風 | 12 | 4 | 5 | 6 | 3 | 5 | 11 | 14 | 11 | 5 | 4 | 3 | 83 |
大風雨 · 大風雨電 · 大風雷 · 大風雪 등 |
1 | 1 | 1 | - | 1 | 3 | 4 | 2 | 5 | 3 | 2 | - | 23 |
폭풍 및 雨雹雷 |
1 | 3 | 3 | 1 | - | 3 | 1 | 2 | 1 | - | - | - | 15 |
暴風雨 | - | - | - | 1 | 1 | 1 | - | - | - | - | - | - | 3 |
恒風 | - | 1 | 1 | - | - | - | - | - | - | - | - | - | 2 |
北風 | - | - | - | - | - | 1 | - | - | - | - | - | - | 1 |
艮風 | - | - | - | - | - | 1 | - | - | - | - | - | - | 1 |
乾風 | 2 | - | - | - | - | - | - | - | - | - | - | - | 2 |
堝風 | 1 | - | - | - | - | - | - | - | - | - | - | 1 | 2 |
旋風 | - | - | 1 | - | - | - | - | - | - | - | - | 1 | 2 |
기타 | - | - | - | - | - | - | 2 | - | 1 | - | - | - | 3 |
〈표 1〉 바람의 종류별 월별 빈도 | |||||||||||||
*주: 고려시대의 기록. *자료: 고려사 |
대풍은 『증보문헌비고』나 『고려사』 오행지(五行志) 오행삼(五行三)의 조(條)에 모두 83회가 기록되어 있다. 대풍 중 가장 약한 상태는 ‘대풍’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피해상황에 대한 기술이 없다. 비교적 강한 대풍에 대해서는 나무가 꺾이거나[折木] 뽑힌 상태[拔木], 돌이나 지붕의 기와가 날아간 상태, 집이 흔들리거나 무너진 상태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다는 상태는 매우 자주 기록되어 있다.
큰 바람의 상태 | 횟수 |
---|---|
큰 바람이 불었다(大風). | 27 |
나무가 꺽였다(折木). | 1 |
나무가 뽑혔다(拔木). | 29 |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았다(拔木飛瓦). | 6 |
지붕 기와가 날았다(飛瓦). | 3 |
집이 허물어졌다(屋毁). | 2 |
기와가 날고 집이 허물어졌다(飛瓦屋毁). | 1 |
집이 허물어지고 나무가 꺾였다(毁屋折木). | 2 |
〈표 2〉 대풍의 강도별 횟수 | |
*주 : 고려시대의 기록. *자료 : 고려사 |
〈표 2〉에서 큰바람은 27회이며, 나무가 꺾였다는 상태는 단 한 번뿐이다. 그러나 나무가 뽑혔다는 기록은 29회로서 가장 많은 빈도를 나타냈으며, 그 중 가장 심했던 것은 충혜왕 복위 2년(1341)의 일로 큰바람으로 소나무 수천 그루가 뽑혔던 기록이다.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았다는 상태는 인종 2년(1124) 8월, 고종 41년(1254) 3월, 원종 10년(1269) 6월, 충렬왕 11년(1285) 7월, 공민왕 6년(1357) 9월, 공민왕 17년(1368) 8월의 6회였다.
단지 지붕의 기와만이 날았던 것은 고종 41년(1254) 정월, 고종 44년(1257) 9월, 충선왕 3년(1310) 2월의 3회였으며, 단순히 집이 무너졌다는 상태는 인종 16년(1138) 6월과 명종 8년(1178) 9월 큰바람이 불어 보제사(普濟寺) 나한당(羅漢堂)과 승평문(昇平門) 오른쪽 모퉁이의 솔개 꼬리가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태조 15년(932) 5월 큰바람으로 관사가 무너지고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던 일도 있었다. 문종 6년(1052) 7월과 우왕 14년(1388) 7월 각각 큰바람으로 집이 무너지고 나무가 뽑혔던 일이 있었고, 인종 2년(1124) 윤3월과 고종 33년(1246) 7월 각각 큰바람으로 집이 흔들렸던 일도 있었다.
모래와 돌을 날리는 큰바람도 인종 20년(1142) 정월, 명종 4년(1174), 명종 8년(1178) 3월과 4월에 있었으며 그 기록을 하나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仁宗二十年正月乙未朔大風終日 飛沙走石 丁己 大風飛沙(1142년).’
바람으로 곡식이 상한 경우도 있었고, 보행이 어려웠던 일도 있다. 대풍에 비 · 눈 · 우박 · 천둥 등이 동반된 경우도 있어 이들을 각각 대풍우(大風雨) · 대풍우박(大風雨雹) · 대풍설(大風雪) · 대풍뢰(大風雷)로 표현하였다. 폭풍은 대풍과 비슷하여 어느 쪽이 더 강한 바람인지 그 강도의 차이를 알 수 없는데, 이는 같은 종류의 바람인데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표현방법이 달랐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폭풍 12회, 폭풍우 3회, 폭풍우박 1회, 폭풍뢰우박 1회, 폭풍질우 1회의 기록으로 오행지에 모두 18회의 폭풍기록이 있다. 〈표 3〉는 고려시대에 폭풍의 강도를 구분하여 그 횟수를 기록한 것으로서 대풍과 별 차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들 상태로 바람의 강도를 추정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폭풍의 상태 | 횟수 |
---|---|
폭풍이 있었다(暴風). | 4 |
우산자루가 꺾였다(折傘蓋柄). | 1 |
나무가 꺾였고 기와가 날랐다(折木飛瓦). | 1 |
기와가 날고 나무가 뽑혔다(飛瓦折木). | 1 |
가옥이 뽑히고 나무가 꺾였다(拔屋折木). | 1 |
나무가 뽑혔다(折木). | 2 |
나무가 꺾이고 모래가 날아올랐다(折木揚沙). | 1 |
황진이 하늘에 차서 사람이 눈을 뜨지 못하였다 (黃塵溺天 人不能開目). | 1 |
폭풍우박 · 폭풍뢰우박 · 폭풍질우(暴風雨雹 · 暴風 雷雨雹 · 暴風疾雨) | 3 |
계 | 15 |
〈표 3〉 폭풍의 강도 | |
*주: 고려시대의 기록. 자료: 고려사 |
즉, 현대 기상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보퍼트풍력계급을 사용하여 〈표 2〉 · 〈표 3〉에 나온 상태들을 고찰해 보면 걸어다니지 못하였다는 경우는 풍력계급 8로서 풍속이 17.2∼20.7m/sec 정도이고, 나무가 뽑혔다고 하면 풍력계급 10으로서 풍속이 24.5∼28.4m/sec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바람의 종류가 그 풍향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즉, 항풍(恒風) · 북풍(北風) · 간풍(艮風) · 건풍(乾風) 등이다.
항풍이 불었다는 기록이 고종 22년(1235)과 고종 44년(1257)에 있으며, 북풍이 충숙왕 복위 6년(1337)에 크게 일어나 모래와 돌이 날고 눈이 쌓였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아 사람과 말들이 앞으로 가지 못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간풍은 주역에서 동북을 가리키며 인종 18년(1140)에 “샛바람[艮風]이 약 5일이나 불어 백곡과 초목이 과반이나 말라 죽었고, 지렁이가 길 가운데 나와 죽어 있는 것이 한 줌 가량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간풍이란 오늘의 높새바람을 말하며 이 건조한 바람으로 곡식과 초목이 말라 죽었다는 묘사는 이 때부터 전해온 것 같다.
방향을 가리키는 바람으로는 건풍이 있는데 이것은 북서풍을 말한다. 북서풍은 헌종 1년(1095) 정월과 의종 11년(1157) 정월에 있었다. 의종 11년의 경우 “바람이 건방으로부터 오니 태사(太史)가 고하기를 ‘나라에 우환이 있겠습니다.’하여 왕이 두려워하며 경천사(敬天寺) 등 다섯 절에 항상 불사를 지어 이를 예방하도록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선종 6년(1089) 4월 한풍(寒風)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데, 태사가 고하기를 “반드시 병혁(兵革)과 한재가 있을 것이니 덕을 닦아 이를 가시소서.”라고 경고하고 있다.
선풍(旋風)에 대해서는 1010년(현종 1) 12월에 단순히 선풍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으나 1363년(공민왕 12)의 선풍에 대해서는 그 상태가 다음과 같이 흥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윤3월 기묘에 선풍이 갑자기 일어나 시장의 여러 물건들이 어지럽게 공중 높이 날아올랐다가 순찰군의 마당에 떨어지니 사람들이 다투어 이를 주워가졌다.”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선풍은 ‘용오름’이나 ‘토네이도’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풍에 관한 기록은 두 번 있는데 큰바람과 별차이가 없으며, 그 밖에 질풍 · 신풍(迅風) · 열풍 등이 각각 한번씩 기록되어 있으나 특별한 상태의 묘사는 없다.
조선시대는 서울에서 풍기관측(風旗觀測)이 행하여졌으며 『서운관지(書雲觀志)』에는 관측 항목 속에 바람은 없지만 관측 원부인 『풍운기』에는 풍향 · 풍속의 관측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바람에 의한 재해기록이 많은데 주목할 만한 폭풍기록을 간추려 보면, 1418년(세종 1)에서 1839년(헌종 5)에 걸친 421년간 총 23회가 있다.
그런데 그 종류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비하여 훨씬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대풍우 · 광풍 · 열풍폭우 · 영풍폭우(獰風暴雨) · 폭풍 · 급우 · 비박(飛雹) 등 바람과 강수현상을 연결시켜서 표현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보면, “ 세종 10년(1428) 7월 백곡의 꽃이 한창 필 무렵 동풍이 그치지 않아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으며, 특히 조생종 벼는 10분의 1밖에 여물지 않았고, 만생종은 아직도 전연 여물지 않고 있으며 동풍피해는 한수해(旱水害)보다 심하다. 내가 즉위한 지 10년 사이에 동풍이 종종 불었는데 아직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동풍은 냉해를 초래하는 바람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현대기상학으로 설명하면 해양성 한대기단의 영향으로 불어오는 동풍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바람의 강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바람으로 인한 피해상황을 간추려 보면 〈표 4〉과 같다.
피해상황 | 횟수 |
---|---|
집이 허물어졌다. | 6 |
배가 파손되었다. | 2 |
나무가 꺾어졌다. | 3 |
나무가 송두리째 뽑혔다. 나무울타리가 무너졌다. | 5 |
나무울타리가 무너졌다. | 1 |
〈표 4〉 바람의 강도 | |
*주: 조선시대의 기록. |
『조선왕조실록』에는 현상이 발생한 시기와 지명 등이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는데, 바람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음력 7월이고 8월이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태풍에 의한 피해라고 여겨진다. 또한, 풍해다발지역을 살펴보면 영남 · 호남 · 황해도 · 함길도 · 제주도 · 강원도의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배가 파손되고 바닷물이 넘치는 등 바람으로 인한 바다사고의 기록은 『삼국사기』나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에 해운업이 상당히 중요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람에 의하여 꽃가루가 날려 멀리 있는 다른 나무나 식물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양귀비나 민들레는 150㎞나 되는 거리까지 날아간다. 민들레의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은 명주실과 같은 가는 털이 햇빛을 받아 따뜻해지고 털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도 가벼운 풍선과 같은 상태가 되어 날아가기 때문이다.
또, 바람을 이용한 것으로는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섬에서 바람을 이용한 풍력 발전소를 만들어 전력을 생산하기도 하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바람을 이용하여 물 위를 가는 범선을 만들기도 하였고, 풍차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올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공기는 물에 비해서 밀도가 대단히 작고 바람도 일정하지 않으므로 수력에 비하면 동력원(動力源)으로서는 불안정하다. 그래서 바람이 강한 외딴 섬이나 산악 지대 등에서 좁은 범위의 발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밖에 어린이들이 놀이에 쓰는 바람개비나 선풍기 · 에어컨(air conditioner), 그리고 현대과학의 최첨단인 제트엔진식 항공기도 바람을 이용하여서 날아다니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기상 가운데 가장 크게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람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민속이나 문학에는 여러 가지로 바람이 나타나 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지상의 인간을 다스리러 내려올 때 우사(雨師) · 운사(雲師)와 함께 풍백(風伯)을 거느렸다고 『삼국유사』에는 기술되어 있다. 이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풍백이다. 바람이 우리 생활에 그만큼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람이 우리 문학에 나타날 때는 한자인 풍(風)과 병행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풍은 다시 풍류 · 풍경 · 풍물 · 풍치 등 다른 한자와 결합되어 새로운 어휘를 만든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물리적인 바람이란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 의미가 확산되어 있다.
바람이 문학작품에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계절적인 감각이다. 봄바람은 생명의 환희를 느끼도록 따뜻하고 부드럽게 노래된 것이 많다. 조우인(曺友仁)이 「출새곡(出塞曲)」에서 춘풍태탕(春風駘蕩)이라 읊은 것이 그것이다. 가는 비[細雨]와 더불어 봄바람에서 생명의 새싹을 어루만지는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
여름바람은 녹음 사이로 부는 바람으로,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에서는 강파(江波)가 보내는 시원한 바람을 기리고 있다. 가을바람은 결실의 바람이면서 또한 죽음과 이별 등을 뜻하는 서글픈 바람으로 그려져 있다. 이덕형(李德馨)의 「사제곡(莎堤曲)」에서는 오동잎 지는 소리에서 가을을 느낀다 하여 바람이 가을을 재촉함을 읊었다.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祭亡妹歌)」에서는 이른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통하여 혈육으로서의 형제간의 정과 장년의 초반에 이생을 하직하고 죽은 누이를 슬퍼하였다.
겨울바람은 모설(暮雪)을 재촉하는 바람이면서 생명의 위축을 가져오는 바람으로 여러 작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김종서(金宗瑞)의 시조에 나타나는 삭풍은 나뭇가지 끝을 날리지만 오히려 이러한 찬바람이 도리어 무인의 기개를 높일 수 있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계절감각 외도 바람은 또한 강호생활의 한가로움을 나타내는 데도 동원되고 있다. 송순(宋純)이 지은 「면앙정가(俛仰亭歌)」에서는 바람을 쏘이며 소요하는 한가로움이 읊어졌는가 하면,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독락당(獨樂堂)」에서는 골짜기에 꽃바람이 불어오는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바람은 바람만으로가 아니라 구름이나 비 등 기타 기상현상과 어우러진 모습으로도 작품에 흔히 나타난다. 「자경별곡(自警別曲)」에서는 바람과 구름의 빠름을 읊어 풍운조화의 이미지를 나타내었다.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에서는 스스로를 구름에 비겨서 바람에 의하여 구중궁궐에 다다르고 싶은 심정을 읊었다.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에서는 천년 노룡이 풍운을 일으키는 모습이 읊어졌는가 하면, 박순우(朴淳愚)의 「금강별곡(金剛別曲)」에서는 우순풍조(雨順風調)를 노래하여 농경사회에서 적절한 비바람의 혜택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바람도 서민들의 시조에서는 물리적인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바람은 곧 님과 나를 막는 큰 장애이거나, 아니면 나와 함께 있는 님을 떠나가지 못하게 하는 방어의 구실로 읊어져 있다. 이와 같이, 삶에 부닥치는 여러 애환이 바람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실질적 생활 등과 아울러 정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