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한상도"
검색결과 총 17건
1946년 6월 이극로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단체.
건민회 (健民會)
1946년 6월 이극로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단체.
1957년 이래 각 동 단위로 조직된 관변 자치조직.
국민반 (國民班)
1957년 이래 각 동 단위로 조직된 관변 자치조직.
4.19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이 남북통일을 위해 구성을 제안한 단체.
남북통일위원회 (南北統一委員會)
4.19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이 남북통일을 위해 구성을 제안한 단체.
1961년 6월 10일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을 공포하여 농어촌민의 생활고를 해결하려 하였던 사업.
농어촌 고리채 및 정리사업 (農漁村 高利債 및 整理事業)
1961년 6월 10일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을 공포하여 농어촌민의 생활고를 해결하려 하였던 사업.
1951년 한국전쟁 전시예산의 재정기반 확충을 위해 제정된 임시토지수득세법에 근거하여, 농지의 규모, 수확량 등을 측정하기 위해, 시·읍·면에 설치한 기구.
농지조사위원회 (農地照査委員會)
1951년 한국전쟁 전시예산의 재정기반 확충을 위해 제정된 임시토지수득세법에 근거하여, 농지의 규모, 수확량 등을 측정하기 위해, 시·읍·면에 설치한 기구.
1949년 한국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한 4가지 조항을 수록한 문서. 외교문서.
대일배상요구조서 (對日賠償要求詔書)
1949년 한국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한 4가지 조항을 수록한 문서. 외교문서.
1948년 5·10 총선거 때 조직되어 1950년 봄까지, 경찰의 하부·지원조직으로 활동한 단체.
민보단 (民保團)
1948년 5·10 총선거 때 조직되어 1950년 봄까지, 경찰의 하부·지원조직으로 활동한 단체.
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홍명희 등 중간세력 중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남한단독선거 결정에 따른 유엔임시위원단 파견, 미소양군동시철수안 입장에서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로 내부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안재홍의 지지파가 탈당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 남북협상으로 균열이 일어나 와해 위기에 있던 정당은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해체되었다.
민주독립당 (民主獨立黨)
민주독립당은 1947년 10월 19일 홍명희 등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조짐을 보이자 홍명희 등 중간세력 중 ‘진정한 우익’을 자임하는 세력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남한단독선거 결정에 따른 유엔임시위원단 파견, 미소양군동시철수안 입장에서 안재홍의 지지파(단선수용파)와 홍명희 등의 반대파(단선반대파)로 내부 갈등이 표출되었다. 결국 안재홍의 지지파가 탈당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 남북협상으로 균열이 일어나 와해 위기에 있던 정당은 결국 1948년 9월 하순에 해체되었다.
방첩대는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정보수집 등 반공·방첩·정보업무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탄압 등을 담당한 군사기구이다. 1948년에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의 특별조사과로 창설되었는데, 방첩대로 개편되었고, 특무대로 변경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전체를 포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육군방첩부대’, 1968년에는 ‘육군보안사령부’,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
방첩대 (防諜隊)
방첩대는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북한정권의 대남간첩활동 조사, 대북 첩보·정보수집 등 반공·방첩·정보업무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승만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사찰·탄압 등을 담당한 군사기구이다. 1948년에 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의 특별조사과로 창설되었는데, 방첩대로 개편되었고, 특무대로 변경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방첩 업무를 담당하는 부대 전체를 포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육군방첩부대’, 1968년에는 ‘육군보안사령부’,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되었다.
신진당은 1946년 9월 남한 내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재미한족연합회·청우당·신한민족당 등 8개의 군소정당이 경운동 천도교 강당에서 창당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으며 중간파 노선을 지향하였다. 1948년 남한 단독 선거 실시에 반대하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반일제투쟁위원회와 통일 지향 세력이 결집한 통일독립촉진회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김구 암살 이후 대한민국의 지지를 표방한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에 중간파 정치 조직이 대한민국 정부 지지를 선언하는 상황에서 북한 괴뢰 집단과 정치적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신진당 (新進黨)
신진당은 1946년 9월 남한 내 중간파 세력이 결성한 정당이다. 재미한족연합회·청우당·신한민족당 등 8개의 군소정당이 경운동 천도교 강당에서 창당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였으며 중간파 노선을 지향하였다. 1948년 남한 단독 선거 실시에 반대하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반일제투쟁위원회와 통일 지향 세력이 결집한 통일독립촉진회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김구 암살 이후 대한민국의 지지를 표방한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에 중간파 정치 조직이 대한민국 정부 지지를 선언하는 상황에서 북한 괴뢰 집단과 정치적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양명산은 해방 이후 국군첩보대 소속 대북요원으로 활동한 군인이다. 상해에서 사업에 종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했다. 이 무렵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로 항일운동을 하고 있던 조봉암을 만났다. 해방 이후 신의주에 건국무역사를 차려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1955년부터 대북첩보기관의 요원으로서 대북교역을 담당하는 등 ‘이중간첩’으로 활약하였다. 1956년 북한정권의 자금을 조봉암에게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1958년 조봉암 등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1959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었고, 조봉암의 사형도 집행되었다.
양명산 (梁明山)
양명산은 해방 이후 국군첩보대 소속 대북요원으로 활동한 군인이다. 상해에서 사업에 종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했다. 이 무렵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로 항일운동을 하고 있던 조봉암을 만났다. 해방 이후 신의주에 건국무역사를 차려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1955년부터 대북첩보기관의 요원으로서 대북교역을 담당하는 등 ‘이중간첩’으로 활약하였다. 1956년 북한정권의 자금을 조봉암에게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1958년 조봉암 등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1959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었고, 조봉암의 사형도 집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청년회연합회 상무위원,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철수 (金喆壽)
일제강점기 때, 2·8독립선언을 주도하였으며, 조선청년회연합회 상무위원,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영친왕과 일본 황족 간의 정략결혼을 저지하기 위해 폭탄 투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서상한 (徐相漢)
일제강점기 때, 영친왕과 일본 황족 간의 정략결혼을 저지하기 위해 폭탄 투척을 계획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회장 민원식을 처단한 독립운동가.
양근환 (梁槿煥)
일제강점기 때,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회장 민원식을 처단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부산에서 항일지하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상조 (李尙祚)
일제강점기 때, 부산에서 항일지하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최원형 (崔垣亨)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국민혁명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24년 1월 중국 광저우에 설립된 군사교육기관이다.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인데 황포도에 소재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이루어진 합작의 결실로 설립되었다. 우한·차오저우·난닝·난창·뤄양·청두·쿤밍 등지에 분교를 설치하였는데, 우한분교에 가장 많은 한인이 입교하였다. 한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추천하여 입교하였으며 의열단원도 입교하였다. 근대적인 군사교육 과정을 이수한 한인입교생들은 1930년대 한인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기여하였다.
황포군관학교 (黃埔軍官學校)
황포군관학교는 중국국민혁명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24년 1월 중국 광저우에 설립된 군사교육기관이다.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인데 황포도에 소재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이루어진 합작의 결실로 설립되었다. 우한·차오저우·난닝·난창·뤄양·청두·쿤밍 등지에 분교를 설치하였는데, 우한분교에 가장 많은 한인이 입교하였다. 한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추천하여 입교하였으며 의열단원도 입교하였다. 근대적인 군사교육 과정을 이수한 한인입교생들은 1930년대 한인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