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김대유(金大猷), 자는 희태(希泰). 김호(金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수창(金秀昌)이며, 아버지는 김주(金柱)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0년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4년에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듬해 성지(城池)·기계(器械)의 안찰어사(按察御史)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1597년에 장령·헌납을 역임하고 1602년 수찬이 된 뒤 집의·사간을 거쳐 1605년에 예빈시정(禮賓寺正)이 되었으며, 그뒤 보덕·필선·홍문관부응교·사인을 거쳐 1608년에는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가 세력을 잡게 되자 양사(兩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즉, "그는 유영경(柳永慶)의 심복으로서 온갖 도의에 어긋난 일을 모의하였는데, 일찍이 적자(嫡子)도 아니요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어대어 감히 왕의 존엄성을 범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마침내 종성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