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그 구성원인 사졸(士卒)을 도부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나장(羅將)과 함께 순군만호부의 주축을 이루었다.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고려 때의 일이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혁파 시기 또한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단종 연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때는 의장부(儀仗府)·견예부(堅銳府)·노부(弩府)와 함께 제부(諸府)로 통칭되었다.
여기에는 중랑장(中郎將) 1인, 낭장(郎將) 3인, 별장(別將) 2인, 산원(散員) 3인과 수를 알 수 없는 위(尉)·대정(隊正) 등의 장교가 있었다. 한편, 여기에 소속된 사졸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들을 지휘하는 장교의 수로 볼 때 대략 500인 정도로 추산된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문무관제를 새로이 정할 때 좌령(左領)과 우령(右領)의 2영으로 편성되었다. 각 영에는 5품직인 중랑장이 1인, 6품직인 낭장이 2인, 7품직인 별장이 3인, 8품직인 산원이 4인씩 배치되었다. 그밖에도 하급장교로서 정9품의 위 20인과 종9품의 정(正) 40인이 2영에 분속되었다.
그 뒤 1394년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의 상서로 좌군·우군·중군의 3군 체제로 개편되었다. 각 군에는 사직(司直 : 태조 때의 중랑장) 1인, 부사직(副司直 : 태조 때의 낭장) 1인, 사정(司正 : 태조 때의 별장) 2인, 부사정(副司正 : 태조 때의 산원) 3인, 대장(隊長 : 태조 때의 위) 20인, 대부(隊副 : 태조 때의 정) 20인이 각각 배치되었다.
한편, 도부외에 소속된 사졸 수는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대략 1,000명 정도였다. 이들은 주로 경기 지역에서 징발된 민정(民丁)으로 구성되었다. 사졸이 되면 약간의 토지를 분급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각사(各司)의 이전(吏典) 및 조례(皁隷)·나장의 경우처럼 실제 근무한 일수를 계산해 가장 많은 순으로 거관(去官 : 일정기간이 차서 實職을 떠나 다른 관직에 임용됨.)할 수도 있었다. 다만, 정원 1,000인 가운데 거관의 혜택을 받는 자는 1년에 겨우 12인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도부외의 주요 임무는 국왕 시위(侍衛)와 도성 순찰이었다. 또한 사졸들은 각사의 하전(下典)과 더불어 각종 노역에 징발·사역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의금부가 사법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정착하고, 부병(府兵)과 한성부(漢城府)가 도성 순찰 등 수도의 치안에 힘쓰게 된 태종 말기 이후, 각종 노역 참가가 주된 임무로 굳어졌다.
그 과정에서 도부외의 존재의의가 희미해졌고, 그 사졸 수 또한 감소하였다. 따라서 1,000명 선을 유지하던 것이 단종 초에는 450인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1453년(단종 1) 의금부의 계(啓)에 의해 일부는 환향되고, 또 일부는 나장을 증원시키는 것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