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영록 ()

등영록
등영록
조선시대사
문헌
조선시대 홍문관에서 관원을 임명하기 위하여 홍문록과 도당록의 기록을 모아 엮은 관찬서.
정의
조선시대 홍문관에서 관원을 임명하기 위하여 홍문록과 도당록의 기록을 모아 엮은 관찬서.
서지적 사항

5책. 필사본.

내용

앞부분에는 홍문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집현전에 재직했던 학사(學士)들의 명단을 실었다. 홍문관에서 작성했다고 판단된다.

본관록(本館錄) 혹은 홍록(弘錄)이라고도 하는 홍문록은 홍문관의 교리·부교리·수찬·부수찬을 임명할 때의 제1차 선거 기록이다. 문과(文科)의 방목(榜目)이 나붙으면 박사 이하의 홍문관 관원이 그 방(榜)에서 적합한 사람들의 명단을 만든다.

이 명단을 홍문관의 부제학 이하 응교·교리·수찬 등 4∼9인이 모여 그 명단의 적합한 인물의 이름 위에 권점을 찍어 추천의 뜻을 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도당록은 제2차 추천 기록으로, 의정·찬성·참찬·대제학·제학·이조판서·이조참판·이조참의 등 4∼9인이 모여 홍문록에 오른 자를 대상으로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다시 권점을 찍어 찬반을 보인 것이다. 이 결과를 왕에게 올리면 그 득점의 순위대로 교리나 수찬 등에 임명되었다.

유독 홍문관에 대해서 이같은 홍문록 본관록의 과정을 거치는 인사 제도가 실시되었던 까닭은, 경연관·언관 학자적 기능을 가진 홍문관원의 인사 행정을 이조의 전횡 가능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등영록’이라는 책 명칭은 홍문관의 별칭이 영각(瀛閣)인 데서 온 것이다. 제1책의 앞부분에는 집현전학사록이라 하여 연대나 좌목에 대한 기록없이 윤회(尹淮) 이하 윤인경(尹仁鏡)에 이르기까지 305인의 명단을 실었다.

이어 김안국(金安國)에서 조문수(曺文秀)에 이르는 552인의 홍문록을 실었는데, 연대·좌목은 밝혀져 있지 않고 해당 시기의 도당록도 누락되었다. 그 뒤 1574년(선조 7)의 것부터 홍문록과 도당록을 병렬시켜 실었는데 연대나 좌목이 부분적으로 밝혀져 있다.

제2책에는 1583년 이후의 홍문록과 1613년(광해군 5) 이후의 도당록을 시기순으로 섞어 수록하였다. 1630년(인조 8) 이후로는 위 칸에 홍문록을, 아래 칸에 도당록을 병렬시켰다. 제3∼5책에서는 1739년(영조 15)∼1891년(고종 28)의 홍문록과 도당록을 실었다. 여기에는 연대와 좌목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제2책 이하에서는 홍문록의 경우 도당록에 들지 못한 이의 이름 아래 미참(未參)임을 기재하였고, 도당록의 경우 홍문관직 제수일과 처음 임명받은 직책을 기재하였다. 제5책에서는 도당록 사이사이에 정자(正字) 등에 대한 임명 내용을 기록하고 내각록(內閣錄)이라 전거를 밝혔다.

의의와 평가

홍문관원은 당대 최고 수준의 능력과 신분을 가진 이들로 임명되었던 만큼 이 책은 조선시대의 정치 세력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홍문관원에 대한 인사 내용은 장서각도서의 ≪청선고 淸選考≫를 비롯해, ≪명세총고 名世叢攷≫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홍문록고」(최승희, 『대구사학』 15·16합집,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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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오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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