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풍수 전문 관료인 상지관은 관상감(觀象監)에 소속되어 땅을 보는 일을 담당하였다. 원래 1392년(태조 1)에 서운관(書雲觀)을 설치하여 천문, 역일(曆日), 지리 등의 일을 맡아 보도록 하였는데, 1466년(세조 12)의 신관제에서 이 서운관을 관상감으로 개칭하였다. 관상감의 업무 중에 지리가 있었고, 이 일을 상지관이 담당하였다.
상지관은 일정한 시험을 거쳐 선발되었는데, 잡과에 해당하는 음양과(陰陽科)의 지리학(地理學)이 여기에 해당한다. 관상감의 지리학 생도 정원은 15명이었으며, 음양과의 지리학은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을 선발하였다. 이 정식 시험이 상지관이 되는 길이었으나, 특별한 경우에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상지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궁궐 조성이나 능침 선정 과정에서 실력이 있다고 소문난 풍수 전문가들을 왕이 직접 임시직으로 임명하여 입지 선정에 관여하게도 했으며, 이 경우 신분이 반드시 중인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전 · 현직 관리, 승려, 재야에 숨어 사는 방외지사, 심지어 노비가 상지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한시적이었다.
상지관은 땅[地]을 보는[相] 관리[官]라는 뜻이다. 『육전조례(六典條例)』의 예전 관상감 지리조에 의하면, 지리학에는 종6품의 교수 1명, 정9품의 훈도 1명 아래에 상지관 7명, 상례관(相禮官) 4명, 별선관(別選官) 6명, 총민(聰敏) 2명을 두었는데, 상지관은 각 능을 봉심할 때 범철(泛鐵) 등의 일을 담당한다고 하였다. 범철은 나침반을 사용하여 방위를 정하는 일을 말한다. 이 외에도 역서(曆書)를 박아 내는 일을 담당하는 인력구관(印曆句管) 10명 가운데에도 상지관이 1명 포함되어 있었다.
상지관은 관상감 소속의 지리학을 전공한 관원으로서 궁궐터, 능 자리(산릉(山陵)과 천장(遷葬)), 태실(胎室), 입비(立碑), 축성(築城) 등의 지상(地相)을 보는 벼슬아치이다. 때로는 지도 제작이나 산실청(産室廳)의 설치, 국왕의 신주(神主)에 쓰이는 나무를 벌목(伐木)해 올 때 방향이 좋은지 나쁜지를 살피기기도 했다. 상지관으로 품계를 지닌 정식 관료는 지리학 교수가 종6품이었고, 지리학 훈도가 정9품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한때 종6품의 지리학겸교수를 더 두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일관(日官)이 천문, 지리, 역수(曆數), 기상 등 모든 것을 담당하였으나, 조선시대의 상지관은 그 가운데 지리만을 한정하여 담당하였다. 상지관은 줄여서 지관이라고도 불리었고, 풍수학인, 상지자(相地者) 등이 혼용되어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었다. 때로는 용사(庸師), 장사(葬師) 등이 상지관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는 대개 풍수를 폄하하여 부를 때 쓰였다.
상지관들은 지위가 낮았으나 때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품계가 오르기도 했다. 조선 초기 새로운 도읍지를 찾거나 한양 천도 후에 왕릉 선정 등 상지관의 업무가 많았을 때에는 상지관의 품계가 1품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상지관 가운데 이양달(李陽達)은 고려시대부터 상지관으로 활동한 인물인데, 조선 개국과 더불어 도읍지 선정에 관여하는 등 지대한 공헌을 하여 세종에 의해 정1품직에 오르기까지 한다. 풍수 전문 관료로서 정1품에 오른 경우는 이양달이 유일하다. 안효례(安孝禮)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과 능묘 자리 선정 등에 기여하여 당상관의 벼슬에 오른다. 이 밖에 조선 개국 초 윤신달(尹莘達), 유한우(劉旱雨), 고중안(高仲安), 문맹검(文孟儉) 등은 조선 건국과 한양 도읍지 조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1441년(세종 23) 전농시 소속의 관노였던 목효지(睦孝智)는 단종의 친모 권씨의 능 자리와 관련하여 세종에게 풍수 상소를 올려 노비에서 면천되고 상지관이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전후에 활동하였던 남사고(南師古), 박상의(朴尙義), 이의신(李義臣) 등도 풍수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유명 풍수가들인데 모두 상지관 출신들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상지관의 업무가 단순히 왕과 왕비가 죽었을 때 능묘 자리 찾는 일로 축소되면서 그들의 품계 역시 현격하게 떨어졌다. 한편 지관, 지사 등의 용어가 조선 후기 이래 최근까지도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풍수 전문 관료가 아니라 단순히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상지관의 운영을 통해 유교 관료 사회였던 조선왕조가 풍수지리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