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널무덤[石棺墓], 원삼국기(原三國期)의 움무덤[土壙墓] 및 기타 유적 등이 독립권역에 위치한 복합 성격의 유적군이다. 이 유적은 1992년서해안고속도로의 건설지점을 지표조사한 후, 1994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추가 발굴 조사되었다.
입지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령산맥의 말단부로 점점이 형성된 분지형 구릉에 속한다. 오석산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구릉이 다시 독립된 산지를 형성하면서 동서로 길게 늘어진 능선의 서쪽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13기, 돌널무덤 25기, 민무늬토기 독무덤[甕棺墓] 1기, 원삼국기 또는 백제시대의 움무덤 17기, 옹관묘 8기, 백제시대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1기, 주구형태(周溝形態)의 도랑, 조선시대의 원형집자리 등이 조사되었다.
집자리는 원형과 장방형(長方形)의 두 종류이나 원형이 주류를 이룬다. 원형집자리는 지름 5∼6m의 크기로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사방에 기둥구멍을 배치한 이른바 송국리 유형이 주류를 이룬다.
출토유물은 송국리형(松菊里形)으로 분류되는 민무늬토기와 석기가 중심을 이룬다. 석기는 삼각형석도, 일단병식(一段柄式)의 돌검이 있고, 돌도끼[石斧]는 합인이 많다.
돌널무덤은 돌출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반경 50m 이내에 밀집된 형상으로 있다. 23기는 능선 정상부에 독립구역을 지닌 채 잔존되어 있고, 2기는 서쪽으로 거리를 둔 곳에 움무덤과 함께 있다.
모두 풍화암반(風化岩盤)을 파서 묘광을 조성하고 묘광 내에 판석(板石) 또는 활석류(割石類)를 사용해 묘실을 조성하였다. 묘실의 장축(長軸), 규모(規模), 사용석재(使用石材) 등에서 차이가 있다. 25기의 돌널무덤은 거의 대부분 유구 자체가 유실되거나 파괴되어 있다.
상부구조인 덮개가 일부라도 남아 있는 것이 8기이고 나머지는 덮개돌이 완전히 제거되고 석관 벽면도 제거된 것이 많다. 규모는 제25호 돌널무덤의 길이가 약 200㎝에 이르지만 파괴된 것으로 부정확하다. 대부분 길이 110∼120㎝ 내외, 너비 50㎝ 내외의 것과, 이보다 약간 규모가 작은 길이 80㎝ 내외의 것이다.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두관족협(頭寬足狹)의 형태도 있다. 사용된 석재는 점판암재의 판석과 할석형 괴석으로 구분된다. 바닥은 부석(敷石)한 것과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다. 돌널무덤 중에서 6기를 제외한 나머지 19기는 돌널 바닥의 한쪽에 요갱형태(腰坑形態)의 구덩이가 시설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빈약하다. 제2호와 제10호 돌널무덤 묘실 내에서 채워진 흙에 뜬 상태로 마제석검편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제15호 돌널무덤에서 민무늬토기편이 수습되었으나 발형토기 하단부 일부만 남아 있었다. 제25호 돌널 내부에서 수습된 돌화살촉은 동일시기에 유행했던 석촉 유형에 속한다.
움무덤은 3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돌널무덤의 분포구역 하단에 있는 것과 집자리 분포구역의 북단 사면에 있는 것, 서남단에 돌널무덤과 함께 있는 것이 있다. 표면 유실이 심해 움[土壙]의 깊이가 대체로 10∼15㎝ 정도만 남아 있다.
그러나 경사진 지형의 풍화암반 또는 지반토에 묘광(墓壙)을 굴착하고 움 내에 목관을 배치해 시신을 안치한 형식이 확인되었다. 묘광은 장축을 등고선방향으로 두고, 규모는 길이 3m 내외와 2m 내외로 구분된다.
부장품(副葬品)은 기본적으로 타날문계통의 호형토기, 횡공(橫孔)이 뚫린 양이(兩耳)가 있는 발형 또는 단지형토기가 부장되었다. 또한 계형토기(鷄形土器)나 대부이중구연호(臺付二重口緣壺)와 같은 특수형의 토기와 옥류(玉類) 및 철도(鐵刀)나 철부(鐵斧) 등의 철기류도 많다.
독무덤은 표면이 심하게 깎여 대부분 바닥만 남아 있다. 단옹 또는 합구식이 함께 조성되면서 옹(甕)은 횡치하여 시설한 것이 지배적이다. 대체로 타날문 계통의 일상용기를 사용하였다.
독(옹관) 내 부장품은 개물형토기(蓋物形土器), 소형 토기편이 있다. 이 외에 민무늬토기 관련 요지(窯址)로 추정되는 흔적과 함께 평천정 유형의 굴식 돌방무덤, 조선시대의 원형집자리도 다수 있다.
오석리유적은 무문토기시대의 집자리와 돌널무덤이 세트를 이루면서 단위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 위에 원삼국기 후반기의 움무덤 및 독무덤이 조성되고, 이어 백제 말기의 돌방무덤이 조성된 복합 유적이다. 무문토기시대 유적은 송국리 유형의 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원삼국기 후반 이 지역에 비교적 규모 있는 집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