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년 미상이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몇 차례의 간행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이본(異本)이 존재한다.
초간본은 1642년(인조 20) 성리설 8권 6책과 원집 11권 6책(또는 5책)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저자의 아들 장응일이 조임도, 신열도와 함께 편찬을 마치고, 인동부사(仁同府使) 김응조(金應祖)의 도움을 받아 간행한 것이다.
중간본은 19세기 말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간에 누락된 시문을 8권으로 편차하고, 부록 2권을 합해 10권으로 속집을 만든 후, 원집 13권과 함께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연보 3권 1책은 1800년대 순조 연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마지막 간행본은 1983년 인동장씨 남산파종친회(仁同張氏南山派宗親會)에서 중간본 원집 13권, 속집 10권에다 연보 3권, 성리설 8권, 역학도설 9권, 용사일기(龍蛇日記) 2권, 급문제현록(及門諸賢錄) 1책 등 46권 30책을 합해 상 · 하 2책 영인본으로 간행한 『여헌선생전서(旅軒先生全書)』이다.
국역서로 성백효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번역해 총 4책으로 완간한 책이 있다. 1집은 원집 권1에서 원집 권6까지, 2집은 원집 권7에서 원집 권13까지, 3집은 속집 권1에서 속집 권5까지, 4집은 속집 권6에서 속집 권10까지이다.
원집 권1·2에는 사(詞) 1편, 부(賦) 5편, 시 83수, 소(疏) 27편이 있다. 권3·4에는 소 9편, 서(書) 30편이 있다. 권5·6에는 서 32편, 잡저(雜著) 10편이 있다. 권7·8에는 잡저 13편, 서(序) 4편이 있다. 권 9·10에는 기(記) 7편, 발(跋) 13편, 논(論) 2편, 명(銘) 2편, 상량문(上樑文) 4편이 있다. 권11에는 축문(祝文) 17편, 제문(祭文) 20편이 있다. 권12·13은 신도비명 1편, 묘갈명 14편, 묘지명 3편, 행장(行狀) 2편이 있다.
속집 권1에는 사(詞) 1편, 부 1편, 시 83수가 있다. 권2·3에는 소 1편, 차 1편, 서(書) 73편, 장(狀) 2편, 축문 4편, 제문 27편, 뇌문(誄文) 1편, 상량문 1편이 있다. 권4∼권8에는 잡저 44편, 비명 3편, 지명 1편, 묘갈명 4편, 음지(陰識) 1편, 행장 2편이 있다. 권9·10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부 「야은죽부(冶隱竹賦)」는 저자 나이 54세 때 금오산을 유람하면서 고려 때의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금오산에 은거할 때 심은 대나무에 대해 읊은 것으로, 길재가 금오서원에 배향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시는 영경(詠景) · 영회(詠懷) 등으로, 주로 도학적인 형이상(形而上)의 이론이 많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무제(無題)」에서 천지를 집으로, 해와 별을 창으로 삼는다는 등의 시구를 통해 저자의 광활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소 중 「응지진언소(應旨進言疏)」는 7월 중순경 대궐에 친 벼락으로 중외(中外)에 구언(求言)하는 교명(敎命)에 대해, 역리(易理)를 들어 임금이 수성(修省)함으로써 전화위복이 되도록 권유한 상소이다.
서의 「답문목(答問目)」은 주로 상 · 제례(喪祭禮)에서의 의례(疑禮) · 변례(變禮)에 대한 지구(知舊) · 문인들의 광범위한 질문에 일일이 전거(典據)를 들어 대답한 것이다. 그의 예학과 사상의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잡저 중 「학부명목회통지결(學部名目會通旨訣)」은 이학 이론의 근원이 되는 천지(天地) · 이기(理氣)에서부터 학문의 실천 방법인 수신(修身) · 성심(誠心) 등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어들을 분석하여 성리학에 관한 체계를 설명하였다. 그의 학문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논저이다. 「사물편(事物篇)」 ·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 「심설(心說)」 · 「도통설(道統說)」 등에서는 저자의 이기 철학의 태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저자는 이기에 대해 이물이본(二物二本)이 아니라 서로 체용(體用)이 될 뿐이라고 하였다. 심정(心情)의 발동에 관해서는 호발설(互發說)을 부정하고 기발이본설(氣發理本說)을 주장하고 있다. 「인심도심설」에서는, 인심과 도심의 차이는 단지 사(私)와 이(理)의 차이밖에 없어서 일본(一本)으로 말하면 인심과 도심이 모두 같다고 하였다. 「심설」에서는 우주를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이해하고, 또 “이는 기(氣) 가운데 있어서 모든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 이(理)의 주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 이기설은 이황의 호발설(互發說)도 부정하고, 이이(李珥)의 기발설(氣發說)과도 다른 독특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문설(文說)」에서는 글이 육경(六經)을 중심으로 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인사업(老人事業)」에서는 노인이 평소 지켜야 할 도리를 천지의 도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서원설(書院說)」은 서원의 의의와 연혁과 공능(功能), 그리고 향제(享祭) 등의 의의를 밝힌 것이다.
기 중 「부지암정사기(不知巖精舍記)」는 그가 강학하던 부지암정사에 대한 기문이다. 그의 호설(號說)인 「여헌설」과 함께 저자의 학문적 경향과 의지를 밝힌 명작으로 꼽힌다.
논 중 「문무일체론(文武一體論)」은 도(道)에 경위(經緯) · 표리(表裏)가 있듯이 문무(文武)도 그와 같아서 문은 경(經) · 이(裏)이고, 무는 위(緯) · 표(表)가 되어 문무가 일체가 된다고 강조하고, 문무를 동일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논설이다. 이는 무(武)를 경시하던 당시 풍조에서 볼 때 주목되는 주장이다.
속집의 시 중 송대(宋代)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시를 주1 11수의 시에서는 우국충정을 표출하고 있다. 또한 서는 주로 문인 · 자제들과 학문, 특히 예학에 대해 문답한 것이 많다.
잡저 중 「골육론(骨肉論)」은 부자와 형제간에 지켜야 할 애정의 도리를 논한 것이다. 「서부묘상소하비후(書祔廟上疏下批後)」 · 「병인상례설(丙寅喪禮說)」 · 「관의(冠儀)」 · 「혼의(昏儀)」 등은 모두 예학에 관한 논저이다. 「인신설(人身說)」 ·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 · 「만학요회(晩學要會)」 · 「평설(平說)」 · 「구설(究說)」 등은 모두 성리학에 관한 자료로 그의 이기철학관(理氣哲學觀)을 엿볼 수 있다. 그 중 「우주요괄첩」은 단행본으로도 간행되었다.
「녹의사질(錄疑竢質)」은 『대학』 · 『중용』의 편차 및 내용의 훈고(訓詁)에 대해 의문되는 곳을 지적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정주(程朱)의 학설도 많이 언급하고 있다. 「갑자추조록(甲子趨朝錄)」 · 「병인추조록(丙寅趨朝錄)」은 왕의 소명(召命)에 응해 왕과의 답문 내용을 적은 것으로, 저자의 정치관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