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전라도병수사, 강화부윤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영중(榮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8년(선조 31)
사망 연도
1657년(효종 8)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전라도병수사(兵水使)|강화부윤
정의
조선후기 전라도병수사, 강화부윤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영중(榮仲).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부원수 이빈(李薲)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때는 벼슬도 없으면서도 아버지를 따라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멀리 거둥해 임시로 머무는 곳)에 갔다.

이때 국왕을 따른 관원의 자제들로서 부형을 모시고 온 자는 이광영 뿐이었다고 한다. 이에 선조는 상례를 벗어나 직접 급제시켜 벼슬을 주는 포상을 하였다. 또, 아버지를 따라 진해로 남하하면서 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적병이 물러나고 서울로 돌아온 뒤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전라도의 병·수사(兵水使)를 역임하였다.

이 때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김상궁의 가까운 친족이 권세를 믿고 법을 어겼다. 김상궁은 편지를 써서 완만하고 부드럽게 부탁했고, 광해군 또한 밀지를 내렸지만, 이광영은 이것이 정당하지 않았기에 찢어버려 형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의 미움을 몹시 받다가, 서궁(西宮: 1618년에 폐비된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경운궁. 곧 지금의 덕수궁. 이 때문에 인목대비를 직접 지칭하기고 함.)에 문안했던 일과 이이첨(李爾瞻)의 죄에 연루되어 마침내 진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연이어 장흥·양주 두 읍의 수령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곧 강화부윤으로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강화도로 축출되면서 조정에서 특별히 이광영을 택한 것이었다. 부임한 즉시 몸소 광해군의 거소를 살피고 유배 생활의 어려움을 물어보는 등 너그럽게 하고, 음식과 의복을 풍부히 하며 깨끗하게 보살폈다.

광해군은 이상하게 여겨 새로 부임해온 부윤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이광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한숨을 쉬면서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을 일찍이 내가 파면하고 배척했으니 오늘의 재앙은 마땅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재호집(在湖集)』
집필자
조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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